바야흐로 대한민국의 조신했던 남자여자가 사련(邪戀)에 빠진 게 아닌가 싶다. ‘싱글즈’는 물론 ‘앞집 여자’까지 ‘바람난 가족’ 대열에 끼어들더니 급기야 ‘조선남녀 상열지사’를 영화로 표현한 ‘스캔들’까지 등장했다. 땅에 떨어진 도덕률을 개탄하는 건 아니다. 아무리 문화가 사회를 반영한다지만 우리 사회엔 커플스도 있고 뒷집 여자도 있다. 내가 관심 갖는 대목은 이들 문화상품이 순수로 코팅된 당의정 껍질을 깨고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불려 온 인간본성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는 점이다. ▼낭만적 사랑과 한국 ▼ ‘나는 레이스가 달린 팬티는 입지 않는다’로 시작되는 소설 ‘낭만적 사랑과 사회’는 이를 서술적으로 풀어 쓴 발칙한 정치학이다. 딱히 내세울 게 없는 여주인공은 조건 좋고 장래가 보장되는 남자와 결혼할 방법이 연애밖에 없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러기 위해선 강하고 아름다워져야 한다. 안 되면 그렇게 보이도록 위장술에 능란할 필요가 있다. 이 소설이 정치적으로 읽히는 이유는 낭만적 사랑과 사회의 ‘누렇게 물 빠진’ 속내를 공개해서만이 아니다. 정치와 그 궁극적 목적으로서의 집권이라는 것이 연애와 결혼의 상관관계와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서로 쌍(雙)으로 묶이지 않고는 존재할 수 없는 두 가지가 남녀 사이와 지배자-피지배자 관계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까지 거론하지 않더라도, 연애와 정치엔 공통점이 많다. 우선 상대를 유혹하는 과정부터 그렇다. 연애할 때 “당신을 행복하게 해 주겠다”가 오래된 사탕발림이듯 선거전에서 정치인은 “국민을 잘살게 해 주겠다”며 온갖 공약을 늘어놓는다. 소설에서 여자가 ‘순결해 보이기 십계명’을 실천하는 것도 정치인들이 가장 개혁적 민주적인 양 위장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우리 대통령이 집권 전엔 7%의 경제성장률을 약속했는데 지금은 2%나 될지 모르겠다는 한탄은 하지도 말자. 피차 속고 속이는 파워게임이다. 순수한 사랑을 모독하는 것 같아 죄송하지만 과학적 연구에 따르면 유전자는 원활한 2세 복제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한다. 성과 사랑은 이를 위한 일종의 장치일 뿐. 구국의 결단으로 미화되는 정치인들의 행위도 부귀영화와 정권(재)창출 같은 지극히 이기적 동기 때문이라는 건 며칠만 신문 봐도 안다. 집권측이 바른말 하는 언론을 싫어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결혼 결심에 큰 역할을 한 상대의 바로 그 매력이 결혼 후엔 짜증스러운 고질로 돌변한다는 사실도 공통적이다. 대통령 후보자로서는 멋있게 보이던 솔직한 언행과 신선한 아마추어리즘이 집권 후 마이너스로 작용한다는 건 백 만인이 공감하는 바다. 그래서 마키아벨리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지도자의 속성과 실제로 승복하는 지도자의 자질은 다르다고 했던가. 결혼이든 집권이든 일단 하고나면 그 이전의 감정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다. 사랑의 유효기간이 끝난 사람들은 사랑보다 깊고 슬픈 정으로 살거나 갈라서는 걸 택한다. 정치를 못하면 총선으로 책임을 물을 수 있는 내각제와 달리 대통령제의 국민은 좋으나 싫으나 임기를 견뎌야 하는 게 차이라면 차이다. 사랑과 결혼에 관한 문화 신상품에서 또 하나의 해법으로 묘사되는 것이 ‘쿨’하게 살기다. 젊은층의 새로운 화두로 떠오른 쿨한 삶은 관계에 연연하지 않고 감정에 질퍽대지 않는다. 얄밉게 자신의 욕구에 충실하되 남을 해코지하는 법은 없다. 정치에 대해서는? 신경을 꺼 버림으로써 스스로 건강하게 살 방도를 찾는다. ▼쿨한 정치는 왜 안 보이나 ▼ 안타깝게도 우리 정치인은 쿨한 관객의 수준과 거리가 멀게 추하다. 당의 공천을 생명줄로 믿고 남 탓하기를 취미로, 남의 발목잡기를 특기로 삼는다. 개혁세력이라던 386도 정권에 들어가면 구 정치인과 마찬가지니 세대차라 할 수도 없다. 영화 잘 만들던 감독도 장관된 뒤 똑같아지는 걸 보면 정치판이 그런 곳인 모양이다. 사랑에서 정치까지, 지배와 착취로 이어지는 인간관계에 대해 앨런 블룸 같은 철학자가 제시한 평화적 해결책이 법과 계약이라는 인위적 구조물이다. 대화와 타협은 듣기엔 이상적이지만 정부(情夫)의 밀어처럼 허망하다. 정치인이 헌법과 제도를 우습게 볼 때 암만 한때 사랑했대도 우리에게 희망은 없다. 김순덕 논설위원 yur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