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김순덕칼럼]우리가 사랑하는 방식

  • 동아일보
  • 입력 2003년 10월 31일 18시 26분


누가 뭐래도 노무현 대통령은 참 행복하다. 사랑한다고 입을 모아 외치는 사람들이 있으니 말이다.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노사모)은 얼마 전 ‘가을 나들이 행사’에서 선언문을 내고 ‘부패한 정치집단을 청산하고 참신한 개혁세력을 그 자리에 세울 것’이라며 ‘그것이 우리가 노무현을 사랑하는 방식’이라고 했다.
하지만 사랑에 눈이 먼다는 말이 있다. 사랑만큼 듣기만 해도 황홀한 말이 없지만 자기 사랑만 옳고 남의 사랑은 틀렸다고 할 때 비극이 발생한다.
▼사랑이라는 이름의 착취 ▼
노사모 게시판엔 대통령 집사와 운전사가 수상한 돈을 받은 것이나, 대선 때 수십억원을 불법모금한 데 대한 비판이 거의 없다. ‘우리’는 깨끗한 희망돼지의 선거자금으로 선거를 치렀고 나머지 절대 다수의 정치집단은 썩어 문드러졌다고 믿는 분위기다.
자신만을 정의로 여기고 다양성을 부정하며 미디어를 최대한 활용한다는 점에서 이들은 지금 이라크를 불태우고 있는 근본주의자들과 닮았다. 노사모를 탈레반이라고 자칭한 명계남씨는 선견지명이 있었다. 이집트 종교학자인 자키 바다위가 “근본주의자들은 상대의 의견을 전혀 들으려 하지 않고 하나의 소리만 원한다”고 한 말에 노사모는 안타깝게 적용된다.
열정적 사랑은 사회의 질서와 의무라는 관점에서 위험하다고 지적한 이가 영국의 사회학자 앤서니 기든스다. 극단적 선택마저 마다하지 않게 만들기 때문이다. 게다가 사랑도 일종의 권력관계다. 상대방이 나를 더 사랑한다는 것을 아는 순간부터 인간성과 상관없이 받는 쪽은 폭군이 되고 그의 사랑은 이용당하기 쉽다. 선거로 집권한 히틀러나 무솔리니의 ‘대중독재’까지 가지 않더라도, 수능시험 앞둔 고3 엄마의 눈물겨운 하루만 봐도 안다. 하야 시점이 다가올수록 ‘고3님’의 폭정(暴政)은 하늘을 찌른다.
그들은 공부를 하는 것도 부모를 위해서고, 밥을 먹는 것도 엄마를 위해서인 줄 안다. 성적이 나쁜 건 아빠의 경제력이 부족해서, 엄마의 정보력이 모자라서 좋은 과외수업을 못 받은 까닭이라고 믿는다. 잘못된 교육제도의 희생양이라며 저 혼자 불쌍해 할 뿐, 부모에 대한 고마움이나 미안함 따위는 약에 쓰려고 해도 못 찾는다.
그런 자식 때문에 속이 뒤집어져서, 저 위해서 공부하지 나 위해서 공부하나 싶어 가슴을 치는 엄마들이 그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볼 게 있다. 그런 뒷받침이 과연 순수하게 자식 잘되기만을 바라서인지 말이다.
아이 성적이 엄마 성적이어서, 아이 성공이 부모 성공이어서, 연금보험까지는 안 돼도 노후장애는 안될 테니까 하는 심정이 가슴 한쪽에 숨어 있음을 부인하기란 쉽지 않다. 그렇다면 부모를 노예 부리듯 착취하는 아이들을 괘씸해 할 것도 없다. 부모 자식간에도 사랑으로 포장된 이기심이 엄연히 존재한다는 얘기다. 스피노자식으로 말하면 사랑의 보상심리다.
누구나 마찬가지겠지만 지도자도 자신의 성공을 쉽게 만드는 군중을 좋아한다고 버트런드 러셀은 지적했다. 특히 웅변가는 사고보다 감정에 치우치고 두려움과 증오로 넘치며 당장 분개하거나 희망에 굶주린 군중을 원한다고 했다. 문제는 지도자가 군중의 신뢰를 이용해 스스로 폭군의 자리를 다지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대통령과 노사모도 이 굴레를 쓰지 않으려면 더 늦기 전에 스스로를 돌아봐야 한다.
▼진정 대통령을 위한다면 ▼
개인간의 사랑은 그들만의 행불행으로 끝나니 그나마 다행이다. 하지만 집단이나 지도자에 대한 사랑은 달라야 한다. 구성원 전체의 운명에 영향을 미치므로 함부로 내 사랑방식을 주장할 일이 못된다. 개인끼리는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사랑이 바람직하지만 공인에 대해서는 이성과 공익을 잣대로 한 엄한 사랑(tough love)이어야 모두의 불행을 막을 수 있다.
노 대통령이 재신임 투표를 받겠다고 선언한 뒤 곧바로 광주 노사모에 친서를 보낸 것은 수험생 같은 이기심이자 자기를 대통령 만들어 준 군중을 이용하려는 정략이 아니던가. 검은돈에 대해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는 지금, 노사모가 진정 노무현을 위하는 사람들이라면 ‘대통령이 말하시오’ 촉구하고 사조직 해체를 선언해야 한다. 이 나라는 노사모만이 아니라 노무현을 덜 사랑하는 사람들도 사랑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김순덕 논설위원 yu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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