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 풀리테(Mani Pulite·깨끗한 손). 1992년 이탈리아를 들끓게 했던 ‘부패와의 전쟁’을 일컫는 말이다. 대통령 측근비리와 불법 대선자금을 철저히 파헤쳐 부패를 뿌리뽑아야 한다는 의미에서 마니 풀리테가 전범(典範)처럼 언급된다. 그러나 이번 검찰 수사는 결코 마니 풀리테처럼 해선 안 된다. 마니 풀리테는 시작은 장중한 비극이었으나 코미디처럼 끝나버린, 결국 실패한 개혁이기 때문이다. ▼지겹다, 용두사미 개혁 ▼ 마니 풀리테를 지휘한 안토니오 피에트로 검사는 전직 총리를 포함해 수천명의 정치인과 경제인을 부패혐의로 기소했다. 그런데 정작 감옥에 간 사람은 10명도 안됐고 거의 무죄로 풀려났다. 기나긴 재판과정에서 성질 급한 몇몇만 목숨을 끊었을 뿐이다. 10년이 지난 지금, 잡혀갔던 정치인과 경제인들은 진작 제자리에 복귀했다. 미국이나 유럽연합 같으면 어림없는 일이다. 부패는 여전하다. 사법기관에의 뇌물 제공과 부패 죄목으로 재판까지 받았지만 멀쩡하게 총리직을 수행하고 있는 실비오 베를루스코니가 이를 증명한다. 왜 이렇게 됐을까. 가까운 원인은 마니 풀리테가 시작된 지 3년쯤 지나자 정계에서 “정치인들 씨를 말리기 전에 끝내야 한다”고 들고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들은 마니 풀리테가 좌파 음모에 의해 진행되고 있다며 거꾸로 피에트로 검사를 27개 죄목으로 옭아맸다. 피에트로 검사는 마니 풀리테에서 손을 떼고 정계에 입문했다. 그러나 더 큰 원인은 이탈리아 풍토와 국민에서 찾아야 한다. 마키아벨리식 권모술수가 지배하는 이 나라에서 법과 국가기구는 우습기 짝이 없는 존재라고 영국의 이코노미스트지는 지적했다. 세금 꼬박꼬박 내면 바보이고 뇌물은 일상사다. 이 나라 최대 부자 베를루스코니 총리가 외국 언론한테 ‘민주주의를 악용하는 자본주의자’로 불리며 국제망신을 시키는데도 이탈리아인들이 명랑하게 사는 이유가 여기 있다. 총리는 그저 남들 하는 대로 살았을 뿐이라는 거다. 상원의원이 된 피에트로가 반(反)베를루스코니 운동을 펴고 있지만 그들은 관심이 없다. 사실 반부패 개혁이라는 것은 정치인이 반대파를 얽어 넣을 수 있는 가장 손쉽고도 매력적인 무기다. 국민의 공분(公憤)을 얻기 때문이다. 정치와 돈은 불가분의 관계인 것. 털어서 먼지 안 나오는 자 없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국민은 염증을 내고 수사는 용두사미가 된다. 법과 제도와 의식이 바뀌지 않고 정치가 경제를 좌지우지하는 체제가 계속되는 한, ‘개혁파’가 집권해도 마찬가지다. 돌아가며 해먹는 것일 뿐. 기이하게도 지금 우리나라에서도 이 같은 조짐이 보이기 시작한다. 검찰총장과 경제부총리, 새 전경련 회장까지 수사를 빨리 끝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국익과 경제를 생각해서란다. 썩은 정치에 격분하던 사람들도 더 이상 흥분하지 않는다. 신문 보기도 지겹다는 사람이 늘고 있다. 이제 우리가 선택할 차례다. 마니 풀리테처럼, 이탈리아처럼 아름다운 명분을 들먹이며 부패와의 전쟁을 흐지부지 끝내고 영원히 부패와 함께 살아갈 터인가. 아니면 이참에 더러운 관행을 털어버리고 투명한 정치사회로 거듭날 것인가. ▼부패 없애야 경제도 산다 ▼ 경제를 생각해서 대충 마무리하자는 주장은 사기(詐欺)에 가깝다. 부패는 국가경제능력을 떨어뜨린다는 2000년 국제통화기금(IMF)의 연구가 이를 입증한다. 최근 미국의 밴더빌트 대학 마라 파시오 교수도 47개국 2만개 기업을 조사한 끝에 “정경유착 기업은 효율성보다 정부관계에 신경 쓰느라 경쟁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결과를 내놓았다. 그러고 보면 우리나라의 기업경영은 기적 같다. 그렇게 뜯기고도 죽지 않은 것이 놀랍다. 하지만 괜히 살아남은 게 아니다. 근로자와 소비자에게 돌아갈 몫을 정계에 바치면서 잇속을 챙긴 덕분이다. 기적적인 쪽은 이런 사회 속에서도 열심히 살고 있는 우리들 자신이다. 우리가 다시 한번 기적을 발휘할 때다. 철저한 단죄까지의 과정이 지루하고 비생산적으로 비칠지 모른다. 국민이 관심을 잃고 언론에 진력을 낼 때 부패 관행은 불사조처럼 살아난다. 독립적 사법기관, 자유로운 언론, 강인한 국민만이 기업을 털어 정치인 배 채우는 도둑정치(Kleptocracy)를 끝장낼 수 있다. 김순덕 논설위원 yur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