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하야하지 않으면 차우셰스쿠 꼴이 될 거요.” 그루지야의 반(反)정부 지도자들이 예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 대통령과의 최후 면담에서 경고했던 말이다. 감히 나를 백성들에게 처형당한 루마니아 독재자와 비교하다니. 셰바르드나제는 진노했다. 그러나 며칠 못 갔다. 결국 그는 물러났고 동서냉전의 붕괴를 몰고 왔던 탁월한 지도자의 명예는 땅에 떨어졌다. ▼개혁가에서 부패정치인으로 ▼ 그도 한때는 개혁적인 인물이었다. 그루지야 공산당의 부패가 극심했던 1972년, 구소련 정부는 부패를 일소할 사람이 셰바르드나제밖에 없다고 봤다. 당 지도자로서 그가 한 첫 조치는 외제시계가 번쩍이는 당 간부들의 손목에 수갑을 채운 일이었다. 외무장관 잘하다 90년 갑자기 물러난 것도 “반개혁 세력이 독재부활을 꾀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런 그가 어떻게 부패국가 ‘바나나 공화국’의 원수가 됐을까. 일주일 전 쫓겨난 남의 나라 대통령을 거론하는 이유는 그의 몰락이 시사하는 게 크기 때문이다. 행복한 집은 비슷비슷해도 불행한 집은 다 다르다는데 실패한 정권의 경우엔 어느 나라나 비슷하다. 국내외적 정책 잘못을 꼽자면 한이 없지만 문제의 핵심은 부패와 경제난이다. 그리고 그 책임은 최고지도자에게 있다. 우리나라도 외국서 보기엔 틀림없는 ‘바나나 공화국’이다. 최근 한국 상황을 보도하는 외국 언론들은 한결같이 “부패가 정치 경제발전을 막고 있다”며 대통령의 부패스캔들을 지적한다. ‘측근’의 비리라고 아무리 외쳐도 결국은 대통령의 비리요, 부패다. 셰바르드나제도 개인적 부패로 공격받은 적은 없었다. 비교하기 이를지는 모르겠으되 셰바르드나제와 노무현 대통령에게는 부패와 경제난을 잉태할 수 있는 공통점이 있다. 바로 측근정치다. 92년 금의환향한 셰바르드나제는 분리파 공격에 맞서야 한다며 ‘대통령당’인 그루지야시민연합을 결성했다. 주변은 능력보다 코드 위주로 채워졌고 민영화된 주요 산업은 대통령 친지와 패거리에 넘어갔다. 대통령의 절대적 신임은 절대적 부패로 이어지는 법. 권력의 단맛을 본 신흥세력은 뇌물과 축재에 익숙해졌다. 공직에 몸을 담은 자들은 허가받은 도적 떼였다. 법은 무시당하기 위해 존재했다. 개혁 시도가 없었던 건 아니다. 2000년엔 반부패위원회까지 구성했으나 최종보고서는 언론공개 전 셰바르드나제 수중에 들어갔다. 반부패 처방은 흐지부지됐다. 지금 새 지도자로 우뚝 선 미하일 사카슈빌리가 당시 법무장관직을 박차고 나온 것도 이 때문이다. 측근들의 힘이 어찌나 막강한지 대통령 퇴진 이틀 전 국가보안위원장이 “대통령한테 가는 정보를 측근집단이 막고 있다”고 폭로했을 정도다. 이런 비교에 ‘정신적 여당’과 청와대는 불쾌할지 모른다. 그러나 노 대통령이 측근비리 특검을 거부한 것은 부패에 철저히 대처하지 않겠다는 선언과 다름없어 보인다. 검찰이 아무리 엄중하게 수사해 결과를 내놓는다 해도 곧이곧대로 믿을 국민은 거의 없을 거다. 집단건망증이 도지지 않는 한 특검으로 다시 파헤쳐야 한다는 주장이 나올 게 분명하다. 어떤 측근이 노 대통령의 눈과 귀를 가로막는지 몰라도 대통령이 둔 악수(惡手)는 이뿐 아니다. 재신임 국민투표 제안도 일견 순수한 충정 같지만 실은 두렵기 짝이 없는 헌법 유린적 발상이었다. 대통령이 세상에서 가장 민주적 지도자인 양 강조해 온 대화와 타협이 실정법을 무시한 적은 어디 한두 번이던가. ▼부패가 경제를 무너뜨린다 ▼ 셰바르드나제가 권력을 지탱할 수 있었던 것은 과거 찬란했던 명성과 송유관 통로라는 지정학적 전략적 중요성 덕분이었다. 그러나 이로 인한 미국의 지지도 고질적 부패가 잡아먹었다. 그루지야에 들어간 미국 기업들이 일을 못할 정도였기 때문이다. 외국투자자들도 발을 끊었고 공장은 문을 닫았다. 나라는 점점 가난해지는데 대통령 언저리만 잘사는 것을 국민은 용납하지 않았다. 부패와 경제파탄이 샴쌍둥이라는 것을 그루지야를 보면 알 수 있다. 우리가 부패를 찍어내지 않으면 부패가 정치를, 경제를, 민주사회를 무너뜨린다. 그리고 부패의 정점엔 언제나 최고지도자가 있다. 대통령이 단호해지지 않는 한 부패는 결코 없어지지 않음을 셰바르드나제가 온몸으로 말해 주고 있다. 김순덕 논설위원 yur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