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마다 사회를 관통하는 키워드가 있다. 유행어일 수도 있고, 정권이 내세운 구호가 국민정서와 맞아떨어질 때도 있다. 지금 우리시대 키워드는 ‘10억 만들기’와 ‘개혁’이다. ‘부자 되세요’ 유행어에서 구체적 개인적 형태로 진화한 10억원 만들기 열풍은 베스트셀러로, 인터넷으로 번지다 ‘파란만장 미스 김 10억 만들기’ TV드라마까지 낳았다. 노무현 대통령을 탄생시킨 개혁 열풍은 총선에서 50년간 구워댄 낡은 불판을 갈아야 한다는 ‘불판 갈이’ 이데올로기와 결합돼 결국 새 판을 짜냈다. 10억 만들기는 아래에서, 개혁은 위에서 시작된 키워드다. 10억이라는 물질적 가치와 개혁의 정신적 가치가 동시대에 만난 건 우연이랄 수 없다. 통하는 게 있다는 얘기다. ▼소시민의 꿈 ‘10억 만들기’▼ 10억과 개혁은 각각 내가, 사회 전체가 잘살아 보자는 시대정신을 반영한다. 이 두 가지를 추구하는 계층은 대체로 일치한다. 10억에서 ‘소외된’ 이들이 인생역전을 열망하고 새로운 집권세력을 선택했다. 부정한 부(富)를 차지한 기득권 구조의 썩은 불판을 갈아야 모두가 잘사는 사회가 가능하다는 게 개혁논리다. 불판은 바뀌었다. 합의 가능한 것부터든, 반대를 무릅쓰고서든 어쨌든 진보세력은 개혁으로 전진할 터이다. 이제 내가 10억 만드는 일만 남았다. 전 국민이 10억 자산가가 되면 1인당 국민소득 2만달러는 식은 죽 먹기다. 드라마 속 미스 김은 암만 파란만장해도 결국 10억을 만들게 돼 있다. 하지만 내가 현실에서 10억 만들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이재에 어두워서만이 아니다. 새 주류집단의 개혁 이데올로기에 담긴 ‘반(反)10억’ 문화 때문이다. 경제발전을 가능케 하는 문화는 따로 있다. 사람답게 사는 게 중요하지 돈이 대수냐는 사람은 도통했거나 위선자일지 모른다. 부와 경제는 건강, 교육, 삶의 질 등 인간다운 삶뿐 아니라 자유 및 민주주의와도 연관된다. 곳간에서 인심난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경제활동 원리를 만드는 것 역시 문화다. 미국 프린스턴대의 로버트 길핀 교수에 따르면 경제발전은 시장과 기술은 물론 구성원의 가치관과 사회지배층의 이익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우리가 국민소득 1만달러까지 발전한 것도 공부 열심히 하고, 새벽같이 일하며 저축했던 ‘잘살아보세’ 문화 덕이었다. 문화는 변화한다. 사회는 위기상황 때 집단충격을 겪으면서 문화를 갈아 치운다. 아르헨티나의 마리아노 그론도나 교수는 경제성공 지향적 문화와 이를 방해하는 문화를 연구했는데 우리 사회가 불판을 갈며 선택한 건 불행히도 경제성공 방해 문화인 것 같다. 개인보다 집단을, 자유와 경쟁보다 연대와 평등을, 법보다 이념과 타협을 중시하는 사회는 아름다긴 하되 경제가 잘되기 어렵다는 게 학문적 경험적으로 확인된 사실이다. 발전지향적 마인드냐, 발전저항적 마인드냐 따져 봐도 현 사회는 후자에 가깝다. 부의 창출과 기업혁신, 세계화가 아니라 분배와 복지, 정부개입, 국내시장보호 등에 무게중심이 가 있기 때문이다. 시장경제와 세계화의 문제점을 강조하는 교과서로 배운 중학생이 커서 부유한 나라에서 살기를 바라는 건 지나친 꿈이다. ▼反성장문화에선 부자 못 된다▼ 무엇보다 두려운 건 내게 10억이 없을 바엔 남의 10억도 못 봐주겠다는 우리 사회의 이중적 문화다. 서울대 없애고 국립대를 평준화하자든지, 투자도 꺼리는 기업에 사회공헌기금을 강요한다든지, 균형개발한다며 수도권에서 일 잘하는 기업을 지방으로 옮기려는 정책이 그 예다. 잘되는 남의 발목 잡는 데 그치지 않고 끌어내려 물어뜯겠다는 적개심마저 엿보인다. 어차피 불판은 바꿔졌다. 국민이 원한다는데 딴소리해봤자 수구 꼴통으로 몰릴 뿐이다. 이젠 개혁밖에 없다. 단, 개혁과 함께 10억을 만들겠다는 꿈은 포기하는 게 정신건강에 좋지 싶다. 현재 같은 반(反)성공적 문화에선 부자 되기 힘들다. 다같이 못살지 않으면 다행이다. 10억을 벌어주는 ‘10억짜리 불판’은 없다. 김순덕 논설위원 yur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