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김순덕 칼럼]돌아온 트로이 목마

  • 동아일보
  • 입력 2004년 6월 4일 18시 34분


세계제패의 야망을 지닌 서방 강대국이 동방의 작은 나라를 침공한다. 명분은 아름답다. 사랑과 명예를 위해서다. 피비린내 나는 살육, 시신에 대한 잔인한 복수가 이어지고.
이라크전쟁 얘기가 아니다. 전 지구적으로 히트 중인 영화 ‘트로이’의 줄거리다. 지난달 프랑스 칸영화제에서 주인공 브래드 피트가 말했듯, ‘트로이’엔 전혀 3000여년 전 과거사 같지 않은 현실이 생선처럼 펄떡거린다.
▼아가멤논과 부시는 닮았다▼
트로이전쟁을 일으킨 그리스의 맹주 아가멤논은 영락없는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다. 적국 왕자와 도망친 미녀 제수씨는 고마운 전쟁구실이 돼줬다. 아직 실체를 찾을 길 없는 대량살상무기를 이유로 이라크에 쳐들어간 부시 대통령과 흡사하다.
영화에선 등장하지 않지만 아가멤논의 전쟁 결심엔 제우스신이 작용했다. 호머의 ‘일리아드’엔 제우스가 왕의 꿈에 나타나 트로이를 공격하면 신들이 성공을 돕겠다고 했다. “다른 사람이 그런 말하면 안 믿지만 우리의 최고사령관이 그렇다니 참전하겠다”며 이웃나라 왕 네스터가 나섰다.
부시 대통령이 자신에 관해 책을 쓴 밥 우드워드에게 고백했던, ‘하늘에 계신 아버지’로부터 전쟁의 소명을 받았다는 말을 연상케 하는 대목이다. 그리스연합군에 앞장선 네스터는 영국 토니 블레어 총리의 찬조출연 같다.
전쟁영웅 아킬레스는 브래드 피트의 팬들에겐 미안하지만 도널드 럼즈펠드 미 국방장관으로 보인다. 럼즈펠드도 9·11테러 직후 인기가 치솟았을 땐 가장 섹시한 남자로 꼽히기도 했으므로 미남배우에 꿀릴 것 없다.
아킬레스가 반신반인(半神半人)의 천재적 전사(戰士)라면, 럼즈펠드는 전장의 주인공을 군인으로부터 첨단 테크놀로지로 변화시킨 정보화시대의 전사다. 그 디지털문명의 총아인 컴퓨터를 타고 이라크 포로학대 사진이 세계에 퍼져 곤욕을 치렀으니 강점이 순식간에 오점 되는 것도 영웅의 숙명이지 싶다. 아킬레스가 이름을 남기기 위해 전쟁에 나선 것처럼 럼즈펠드는 미국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무력을 휘두르겠다는 신념의 매파다.
영화 속 그리스는 탐욕과 자기애에 빠진 왕이 지배하는 타락제국으로 그려진다. 아무리 민주주의 발생지래도 소용없다. 반면 트로이는 정의와 가족애를 아는 나라다. 현실 속 미국의 눈에 이라크는 독재자가 지배하는 악의 축에 불과해도 이슬람문화에선 이라크가 종교적 가치를 중시하는 문명국인 것과 마찬가지다.
이렇게 보면 미국과 ‘전쟁 최고사령관’ 부시 대통령은 용서할 수 없는 길로 달려가는 양상이다. 말로는 중동에 민주주의를 심겠다지만 이라크전을 일으킨 속셈이 오일 확보에 있다는 건 그 자신만 모른 척할 뿐 다들 안다. 아버지 부시 전 대통령의 걸프전이 쿠웨이트의 석유를 지킨 것과 다르지 않다.
민주당 대선후보가 될 존 케리 상원의원이 트로이 목마를 고안한 오디세우스 같이 현명한 지도자가 될지는 아직 분명치 않다. 옳고 그름 대신 이해득실을 따지는 게 국제관계의 기본이기 때문이다.
▼이라크戰 반대만이 능사인가▼
이런 미국을 비난하기란 영화 한편 보는 것만큼이나 쉽다. 미국도, 민주주의도 싫다는 이라크를 두둔하기도 어렵지 않다. 약자가 되고 싶은 사람은 없어도 약자에 대해 연민을 갖는 것처럼, 강자되기 싫은 사람 없으면서 강자에겐 반감을 갖는 게 보편적 정서다. 30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인간본성은 변하지 않았다.
문제는 한미동맹을 국가안보의 근간으로 삼아온 우리의 현실이다. ‘정당치 못한 전쟁’에 금쪽같은 우리아들을 보내선 안 된다고 주장하는 이들에게 그 이후는 어쩔 것인지 묻고 싶다. 베트남전쟁 참여로 우리가 얻어낸 이득이 결코 작지 않다는 걸 그들은 의도적으로 잊고 있다.
‘트로이’ 속의 트로이는 멸망으로 끝난다. 역사가들은 승자인 그리스가 결국 알렉산더대왕 이후 몰락하며 트로이의 후손은 로마를 건설한다고 했다. 제국이 된 로마 역시 천사표가 아니었음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역사는 반복돼도 인간은 교훈을 얻지 못한다. 영화 한편 보고 나서 쉽사리 잊어버리는 것처럼.
김순덕 논설위원 yu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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