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고난 ‘몸꽝’에다 게으른 천성 탓에 체육이고 스포츠고 즐겨본 적이 없다. 그중에서도 재미없는 게 축구다. 장정 떼가 두 시간 가까이 뛰어도 몇 골 나올까 말까니 지루하기 짝이 없다. 열대야 덕에 한국과 그리스 경기를 보다 축구가 서스펜스 게임이라는 걸 발견한 건 내 인생의 소득이었다. 터질 듯 터질 듯한 골이 언제 터지나 기다리는 스릴이 쏠쏠했다. 온몸으로 공을 막는 김영광을 보며 “내가 알아야 할 도덕과 의무는 어릴 때 골키퍼를 하며 배웠다”는 실존주의 작가 알베르 카뮈를 이해했다. ▼불변의 올림픽과 인간 본성▼ 축구의 정교함을 아는 팬들에겐 미안하지만 이 스포츠가 세계적으로 인기짱인 이유는 단순함에 있다. 골 차 넣으면 점수 나니까 뛰는 이고 보는 이고 어려울 게 없다. 스포츠의 묘미도 그런 것 같다. 긴장과 카타르시스 넘치는 드라마면서 과정 투명하고 결론 명백하니 찝찝하지 않다. 정치 경제 할 것 없이 납득 못할 일이 수두룩한 세상에, 보면 명쾌하게 이해되는 세계가 존재한다는 건 속 시원하고도 고맙다. 스포츠의 제전 올림픽은 이렇게 단순 명쾌하지 않다. 고대올림픽은 전쟁도 멈춘 평화의 축제로, 근대올림픽은 아마추어리즘의 향연으로 그려지지만 그건 현대인의 향수이자 신화에 불과하다. 고대 그리스인에게 가치 있는 일은 경쟁을 해서 이기는 거였다. 올림픽이 돈에 오염됐다는 개탄이 나오나 당시도 그랬다. 경기장엔 폭력이 난무했고 선수들은 지금 돈 30만달러의 포상금을 받을 수 있는 월계관에 목숨 걸었다. 부정과 비리도 만만치 않아 전차 경기하다 굴러 떨어지고도 심판에게 뇌물 바쳐 챔피언 된 자가 네로 황제다. 그리스어에 ‘아마추어’란 의미의 단어가 없는 대신 가장 비슷한 말이 ‘천치’라면 알 만하다. ‘태극 전사’를 강조하는 한국인의 촌스러운 애국심이 비난받곤 하지만 애초 국가와 민족주의를 자극한 건 근대올림픽의 창시자 피에르 드 쿠베르탱이었다. 독일이 1875년 올림피아 유적을 발굴하자 그는 “프랑스가 올림픽의 영광을 재현해야 되지 않겠느냐”고 부추겼었다. 결국 변하는 건 없다. 알몸으로 뛰었던 옛날 선수들이 첨단과학으로 옷을 갈아입었을 뿐, 올림픽은 변하지 않는 인간의 본성처럼 그때 그대로다. 스포츠와 올림픽을 영속케 하는 핵심이 있다. 인간에 내재된 폭력성과 경쟁심이다. 고대올림픽의 유일한 라이벌이 전쟁이었듯, 스포츠는 인간의 폭력성을 덜 폭력적으로 드러내도록 허용된 수단이다. 사냥감을, 적을 추적하고 무찌르면서 승자와 패자를 가리는 전투에 남자는 매료된다. 나 같은 여자가 스포츠에 관심 없는 것도 수렵채집 시절 동굴에서 아이와 살림을 돌본 전력 때문이다. 참가에 의의가 있다고는 하나 올림픽에서 경쟁이 빠지면 스포츠도 아니다. 유전자에 기록된 경쟁본능에 따라 내가 남보다 잘하거나 우리 편이 잘할 때, 인간은 밥보다 중한 자부심에 환호한다. 폭력성과 경쟁은 시장경제 원리와 맞닿아 있다. 기회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되 자원 또는 승자는 한정된 현실이다. 타고나거나 갈고닦은 능력을 바탕으로 자신 또는 상대를 이겨낸 사람에게 보상이 주어지는 건 너무나 옳고도 당연하다. 그 성과는 결국 모두에 돌아온다. 이게 민주주의다. 심판 또는 정부는 경쟁의 룰이 공정하게 지켜지는지 살피면 충분하다. ▼정권은 가도 시장경제는 산다▼ 인간 본성을 바꾸려 들고 오랜 실험에서 입증된 원칙을 부정했던 혁명가와 선동가, 정치꾼은 스포츠를 정권에 이용했던 독재자와 함께 세계사에서 퇴장 당했다. 그런데 우리는 이미 끝난 실험판에서 우왕좌왕이나 하고 있다. 올림픽은 시작됐다. 도저히 일어날 성싶지 않은 환경에서도 일을 내는 게 스포츠의 마력이다. 백인 우월성을 과시하려던 1936년 나치독일의 올림픽에서 미국의 흑인 달리기 선수 제시 오웬스가 금메달 딴 것처럼 말이다. 경제 암흑 속의 우리 현실에도 스포츠 같은 기적이 일어날 것인가. 아니면 평등하게 뛰었으니 격차 없이 메달 분배하라고 우길 것인가. 김순덕 논설위원 yur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