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김순덕 칼럼]민주주의가 울고 있다

  • 동아일보
  • 입력 2004년 8월 27일 18시 59분


참 희한하다. 지구 반대편에 참여민주주의를 유독 강조하는 나라가 또 있다니.
15일 대통령 소환투표를 치른 베네수엘라는 대통령이 나서 참여를 역설해온 국가다. 민주주의는 원래 1인1표를 지닌 국민의 참여를 전제로 한다. 지당한 사실에 역점을 둘 땐 대개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같은 참여정부의 국민 된 입장에서, 대통령직을 잃을 뻔한 위기를 이겨낸 우고 차베스를 보는 심정은 복잡하다. 참여만 비슷하면 차라리 좋겠다.
▼그들은 왜 차베스를 선택했나▼

차베스에겐 ‘차비스타’ ‘볼리배리안 서클’이라는 열렬한 지지자들이 있다. 1999년말 그가 만든 새 헌법은 정부조직으로 입법 사법 행정 외에 선거감시기구와 ‘시민파워’까지 두었다. 이들은 대의민주주의를 경멸한다. 콜럼버스에서 이어진 소수 백인세력이 부와 권력을 독점해온 과거사 때문이다.
차베스의 성공은 인구의 70%가 넘는 빈민층의 참여 덕분이었다. 분노와 증오정치의 폭발력을 간파한 그는 ‘호화별장에서 흥청대는 기름 부자’ ‘약탈적 과두집단’ 같은 수사로 주류세력을 공격했다. 나라는 양극화됐다. 불화와 편가르기가 그의 정치이념이라고 미국 하버드대 리카르도 하우스만 교수가 평했을 정도다.
개혁과 분배를 최우선으로, 국가와 시장에다 연대까지 더한 ‘제4의 길’을 내건 차베스 집권 6년. 그들은 과연 잘살게 됐는가. 영국 이코노미스트지에 따르면 당선 2년 만에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1950년대 수준으로 떨어졌다. 중산층의 국가탈출이 시작돼 2000년에만 15만명이 미국 플로리다로 떠났다. 반(反)시장적 개혁에 투자가 멈췄다. 자본유출을 막겠다며 2003년초 정부가 환율개입을 시작하자 화폐가치는 폭락했다. 작년엔 인플레가 30%였다. 빈곤층은 500만명이 늘었고 지지율이 30%대까지 추락했다.
그런데 차베스는 대통령 불신임투표에서 살아났다. 비결이 궁금하지 않은가. 유가폭등이 일등공신이다. 국민투표 실시 결정 이후 넉 달간 차베스는 세계 5위 산유국의 석유 수입을 빈곤층에 ‘게릴라 복지’로 퍼부었다. 무상교육 의료 식료품까지 지원했다. 58%의 대통령신임 찬성은 여기서 쏟아졌다. 그게 1인1표의 민주주의다. 인간은 이렇게 간사하다. 자신에게 손에 잡히는 혜택이 주어진다면 반대와 지지가 바뀌는 건 순식간이다.
과거 부패했던 주류세력은 차베스의 헌정질서 파괴를 비판할 뿐, 대안을 내놓지 못했다. 그들 주장대로 차베스는 개헌과 개혁입법, 사법개혁을 통해 국회와 법원 중앙은행까지 장악했다. 빈곤층에 쓴다며 국영석유기업(PDVSA)의 수입을 내놓도록 한 것도 위헌소지가 있다. 국민투표 청원에 서명한 공무원의 목을 자르고 투표전날 언론사 사찰까지 했다.
그게 대수인가. 빈민의 구세주인데. 헌법과 국민의 기본권을 무시한 대통령이되 차베스는 분명 민주선거로 선출됐고 재신임됐다. 그렇다면 도대체 민주주의는 뭐란 말인가.
대통령이 무서운 건 이 때문이다. 좌파 대통령 한 사람의 신념이 나라를 바꾸는 현실을 베네수엘라의 차베스가 보여준다. 국민이 선택했다는 이유에서다.
▼이제는 대통령이 무섭다▼
노무현 대통령이 국정이념으로, 때로는 말실수처럼 밝혔던 일들이 하나하나 실현되고 있다. 사회전방위에 지배세력 교체를 이룬 데 이어, 위헌소지가 있는 법률들이 개혁입법이라는 이름으로 추진되고, 이젠 기억속의 잘못까지 물을 태세다. 대통령 못해먹겠다던 그가 국민을 충격과 불안에 몰아넣은 것이 성공의 잣대가 될 수 있다면 노 대통령은 충분히 성공했다.
그러나 1인1표의 민주주의는 권력의 획득을 정당화했을 뿐, 권력의 남용까지 허락하지 않았다. ‘참여세력’을 뒷심삼아 헌법을 흔들고, 법에 의한 지배와 사유재산권 언론자유 등 인간의 기본적 권리를 외면하는 대통령은 자유민주주의의 수장이랄 수 없다. 비자유주의적 민주주의(illiberal democracy)의 선출된 독재자일 뿐이다. 집권세력이 한때 타는 목마름으로 불렀다는 민주주의, 그 민주주의가 지금 그들에게 유린당해 울고 있다.
김순덕 논설위원 yu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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