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리트레아의 미래는 밝다, 나라가 제 궤도에 올랐다,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는 왜 아프리카 최고의 지도자인가. 수단 옆 작은 빈국(貧國) 에리트레아의 신문 톱 제목은 대개 이렇다. 3년 전 정부가 사기업 언론을 없애 버린 뒤부터다. 이 나라의 유일한 사치품인 설탕 값이 느닷없이 뛰어도 국민은 이유를 모른다. 정부가 뭘 어쨌다더라는 소문만 무성할 뿐. 13년 전 신생 국가와 함께 탄생한 아페웨르키 대통령은 30년 독립운동을 이끈 민주적 개혁주의자였다. 언제부터인가 그는 변했다. 그게 권력의 속성이다. 욕심이 생긴 권력은 언론부터 누른다. 싫은 소리 좋아하는 이는 없지만 그걸 막을 힘이 있는 자가 권력자다. ▼비판 싫어하는 게 권력 속성▼ 이름도 순하고 생긴 것도 별로 부덕해 보이지 않는데 왜 그렇게 악독하게 정부 비판을 하느냐는 독자를 더러 만난다. 신문 때문에 불안해진다며 신문만 조용하면 나라가 편안해질 거라는 사람도 있다. 읽어서 편안해지는 인쇄물을 찾는다면 성경이나 불경을 보시라고 했다. 누구나 그렇듯이 나도 알고 보면 부드러운 사람이지만 비판이 내 직업이라고도 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지 않던가. “사흘만 도전받지 않으면 정부는 어떤 일도 꾸밀 수 있고, 그에 관한 대중의 인식도 조종할 수 있다.” 언론인 출신으로 미국 지미 카터 행정부 시절 국무차관을 지낸 호딩 카터의 말이다. 유난히 도덕성을 내건 카터 대통령이었다. 즉 정부가 특별히 사악해서가 아니라 인간이 원래 그렇다는 얘기다. 자기가 옳고 잘났다고 믿는 이들이 선거로 집권하면 증상은 더 심해진다. 투표함은 민주주의의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이 못 된다. 개인이든 집단이든 견제가 없으면 폭군이 되는 법이다. 구린 게 많아 비밀과 억압이 장기인 독재정권에선 말할 것도 없다. ‘아니다’는 소리는 그래서 필요하다. 권력자에게 싫은 소리 해도 미운털 박히지 않게끔 제도적으로 만드는 건 더욱 중요하다. 그 소리 하라고 국민에게서 위임받은 게 언론이다. 민주주의 상징처럼 거론되는 미국 수정헌법 1조에서, 조선시대 경국대전에서 언론자유를 규정해 둔 것도 이 때문이다. 언관(言官)은 면전에서 왕의 잘못된 주장을 꺾는 면절(面折), 뜰에 서서 소리쳐 바로잡는 정쟁(庭諍), 궁궐의 난간을 부러뜨리면서 간언하는 절함(折檻)을 해도 면책특권을 받았다. 이게 싫어 사간원을 없애 버린 연산군은 폭군으로 기록됐다. 언론이 이처럼 특별한 대접을 받는 건 잘나서가 아니다. 감시견 노릇을 잘하라는 이유다. 코드가 같다고, 국물 좀 먹겠다고 이걸 안하고 못하면 언론이랄 수 없다. 알 권리를 위임한 국민에 대한 반역이다. 언론은 폭로라는 힘으로 민주주의에 기여한다. 폭로될 우려만으로도 권력 남용은 줄 수 있다. 언론자유 없이 민주주의 없는 것도 이 때문이다. 특히 국가 위기 때 ‘아니다’라고 외쳐 독재를 무너뜨리는 건 대체로 방송 아닌 신문이다. 2002년 세계은행은 “언론이 돈 되는 정보를 전하고 경제정책의 잘잘못을 평가함으로써 경제를 발전시킨다”는 보고서를 냈다. 투명하고 효율적인 경제국가에서 살고 싶으면 언론자유를 위해 싸우라는 결론이었다. ▼言路막는 정권은 망한다▼ 이런 역할은 정부의 규제를 받지 않는 언론만 할 수 있다. 모든 언론규제법은 언론자유와 자율성을 깨뜨린다는 게 미국의 미디어 컨설턴트 조지 크림스키의 지적이다. 언론 ‘보호’라는 선의에서 비롯돼도 마찬가지다. 세계은행은 언론법 도입만으로도 정보 왜곡이 가능해진다며 “암만 지원금을 퍼준대도 정부 개입은 정당화하기 어렵다”고 했다. 정 손보고 싶다면 세계은행이 조언한 최고의 통제방법을 알려주겠다. 바로 시장경쟁이다. 정권도, 언론도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휴브리스(hubris·오만)다. 힘을 부여해 준 국민을 잊는 순간 오만은 기어 나온다. 정권의 오만을 언론이 비판하듯 언론의 오만은 독자가 심판한다. 그런 비판 언론을 향해 이해찬 총리는 역사의 반역자라고 했다. 제 할 일 하는 신문이 반역자인지, 언론과 자유민주주의의 목을 조르는 정권이 반역자인지 역사가 말해 주고 있다. 김순덕 논설위원 yur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