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김순덕 칼럼]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

  • 동아일보
  • 입력 2004년 12월 31일 17시 48분


“여러분 부자 되세요”가 유행어로, 새해 덕담으로 쓰이던 시절이 있었다. 눈 동그란 여배우가 “꼭이요” 하며 애교 떠는 CF가 나왔던 그때만 해도 사람들은 올해부턴 돈 좀 모으리라 작정하고 주가연동예금에 들든지, 술 담배를 끊든지, ‘10억 모으기’ 같은 책을 샀다.
올해는 농담으로도 부자 되란 말은 하기 힘들다. 했다간 “밥줄 끊어지지 않으면 다행이게”, “회사가 문 닫게 생겼는데…” 소리나 들을 판이다. 괜히 책임지랄까 봐 겁난다.
불과 1, 2년 사이에 사회 분위기가 이렇게 달라진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다. 대통령과 집권세력은 ‘별놈의 보수’와 새 신문법을 만들어서라도 숨통을 죄고 싶은 몇몇 신문이 개혁 발목을 잡기 때문이라고 해 왔지만, 덕분에 국민도 정치권 탓만 하면 대충 면책특권을 누리게 됐다.
▼정치경제가 幸不幸흔들어▼
행복은 돈 주고 못 산다는 이론이 환영받는 때가 행복한 때라는 걸 이젠 알겠다. 돈 있어야 할 수 있는 말이어서다. 영국 미국 일본인의 국민소득이 50년간 엄청 늘었어도 그만큼 행복해지지 않았다는 2003년 리처드 레이야드 씨의 연구가 한 예다. 좋은 환경에 자꾸 적응해서, 남들 다 또는 더 잘살게 돼서 만족할 줄 모른다는 ‘배부른 경제학’이다.
지금 다시 보니 ‘1인당 평균 국민소득 1만5000달러를 넘게 되면’이란 대목엔 눈감고 박수쳤었다. 그 정도 되기까진 소득이 늘수록 행복도 커진다는 게 정설이다. 행인지 불행인지 2004년 말 발표된 전년도 우리나라 1인당 소득이 1만2646달러다. “시대를 거꾸로 살아오신 분들이 득세하는 역사가 계속되는 한 3만 달러로 가면 뭐하느냐”던 어록은 2004년이 가기 전 수정돼야 했다.
최소한 1만5000달러까지는, 심지어 1만5000달러가 넘더라도 개인의 행복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게 고용 여부다. 남의 실업도 내게 불안으로 다가온다. 수입이 줄어서만이 아니다. 아무리 지겨운 일이라도 아무 일도 없는 것보다는 낫다. 능력과 적성에 맞아 할수록 신명나는 일이면 좋겠지만, 설령 안 맞더라도 남의 일보다는 내 일이 제일 쉽고(하던 일이니까) 또 제일 어려운 법이다(나니까 이만큼이라도 하지요). 그래서 부자들도 안 놀고 일하려 든다.
이때 임금이야 많을수록 좋되 적더라도 내 것이 된다는 게 중요하다. 능력대로 일하고 필요한 만큼 가져간다는 유토피아는 사기(詐欺)다. 말 배우는 아이들도 “나”보다 “내꺼야!”를 세게 외친다. 생명 자유 재산이 정치담론의 기본처럼 등장하던 시대, 토머스 제퍼슨이 미국 독립선언문에다 ‘재산’ 대신 ‘행복추구권’을 써 넣은 것도 이 때문이다.
남이 아닌 내가 선택한 일을 해서 당당한 내 재산, 내 행복으로 만들 수 있는 세상이 시장경제 사회다. 숱한 정치제도 중 그래도 다수가 만족하는 민주주의에서의 선거 역할을 시장경제에선 경쟁이 해 준다. 불평등 문제가 심각하다지만 경쟁 기회의 공정성을 정부가 보장한다면, 그리하여 시장경제로 쌓은 부(富)가 정당했다는 사실만 입증된다면 부자를 죄인시할 것도 없다. 되레 죄인 취급하는 이들을 수상하게 볼 일이다.
▼“여러분 행복하세요, 꼭이요”▼
온갖 정치 경제이론과 이데올로기의 ‘쓰나미’(지진해일) 덕에 우리 모두 공부 좀 했던 지난해였다. 다행히도 인간에겐 놀라운 적응력이라는 축복이 있다. 풍요에 익숙해지듯 고통도 얼마든지 견디고 이겨 낸다. 나를 단련(鍛鍊)시키는 불이라고 여기면 오히려 고맙다. 포기하고 다 태워 먹는 사람만 손해다.
산 사람은 살아야 하고 또 사는 법이다. 그래서 어른들은 힘든 때일수록 밥 꼭꼭 챙겨 먹으라고 했다.
김순덕 논설위원 yu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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