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도 급수가 있다. 도덕적 잣대 빼고 효과로만 따진다면, 상대를 감쪽같이 속이는 사기(詐欺)나 새빨간 거짓말이 상급이다. 큰 거짓말(Big Lie)이라는 나치 독일의 선전은 신화적이다. 말하는 이나 듣는 이나 거짓말인지 뻔히 아는 ‘뻥’, 기꺼이 속게 만드는 하얀 거짓말(White Lie)은 경쟁력으로 보면 하급에 속한다. 긴가민가 의심스러울 정도라면 기술이 더 필요한 단계다. 그래도 급수 있는 거짓말로 대접받으려면 거짓말 자격은 갖춰야 한다. 국어사전에 따르면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인 것처럼 꾸며대는 말’이 거짓말이다. 즉 거짓말의 핵심은 거짓말하는 사람이 사실을 알 뿐 아니라 사실을 존중한다는 데 있다. 그래야 사실이 안 드러나도록 조심을 하고, 거짓말로 밝혀지면 반성하며 사과하는 시늉이라도 한다. 그게 거짓말계의 예의고 상식이다. ▼眞實이 무슨 대수냐▼ 그런데 변종이 나타났다. 자신이 한 말이 사실이든 아니든 무슨 대수냐는 거다. 그보다 중요한 건 ○○(여기엔 애국심, 사랑, 시대상황 등 말한 사람 맘대로 집어넣을 수 있다)이라며 되레 진실을 밝혀낸 쪽을 공격한다. 이건 거짓말 축에도 끼워줄 수 없다. 사실을 무겁게 여겨온 거짓말에 대한 모독이다. 이 기이한 상황에 딱 맞는 단어를 미국 프린스턴대 해리 프랑크푸르트 명예교수가 책 제목으로 붙여 냈다. 여자들이 입에 올리긴 거북해도 76세의 철학자가 정한 것이니 그대로 전하자면 ‘On Bullshit’이다. 뉘앙스를 살려 우리말로 옮기면 ‘X 같은 소리에 대해’쯤 된다. 노교수는 거짓말과 bs(아무래도 민망하므로 줄여 쓰겠다)의 가장 큰 차이가 진실을 의식하는지에 있다고 분석했다. bs를 구사하는 이들은 진실 따위엔 아무 상관 안 한다. 특히 정계에서 유행인데, 그들에게 중요한 건 어떤 말을 해서 목적을 이루고 그 후에도 문제없이 잘나가는 일뿐이다. 거짓말보다 bs가 사회에 더 큰 해악을 끼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광재 의원의 경우, 스스로 손가락을 ‘버렸다’면서도 “80년대 시대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손가락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했다. 그의 ‘삶의 상처’를 존중한다. 그러나 그 손가락이 의미 있는 이유는 이 의원이 그냥 개인이 아니라 정치인, 그것도 대통령 최측근으로서 진실성과 도덕성을 상징하기 때문이라는 건 밝혀야겠다. 노동운동하다 손가락까지 잘린 민주화투사로 금배지를 단 사람이 ‘진실규명과는 거리가 먼’ 기사에서 살기를 느낀다니, 누가 누구를 탓하는지 어지러워진다. 거짓말의 치명적인 적이 진실이라고 했던 나치 독일의 요제프 괴벨스가 울고 갈 판이다. 진실의 가장 큰 적은 거짓말 아닌 bs가 됐다는 노철학자의 혜안에 감탄사가 절로 터질 지경이다. 세상의 법칙은 달라졌다. bs 애용자끼리 어느새 룰을 바꿔놓고선 진실이 우스워진 세상을 만든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경제는 완전히 회복됐다”고 당당하게 말한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 병풍(兵風)의 주역 김대업 씨가 희희낙락하며 사과(謝過) 아닌 사과(沙果)를 보낸 정황도 알 것 같다. ▼차라리 거짓말이 그립다▼
바뀐 세상에서 보통사람들이 울화통 터뜨리지 않고 사는 방법은 많지 않다. 첫째는 참여정부 국민답게 동참하기다. 이 참에 bs를 통해 목표를 쟁취하는 적극적 참여와, TV광고처럼 그러려니 여기는 소극적 참여가 있겠다. 둘째는 그래도 진실은 알아야겠다며 깨어있는 건데 편치는 않을 성싶다. 권력 감시가 본분인 비판적 신문을 옥죄는 걸 보면 짐작되고도 남는다. bs 없는 세상으로 ‘개혁’하자면 또 단지(斷指)라도 해야만 하는가. 김순덕 논설위원 yur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