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관들 사이에서 흔히 회자되는 경구(警句)다. 그러나 정부의 ‘최고위 외교관’인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은 너무 솔직하게 직설(直說)을 해 미묘한 파장을 일으키곤 한다.
노 대통령은 14일 3부 요인과 5당 대표를 초청한 청와대 오찬에서 “한일 정상회담을 할 것인지 말 것인지, 한다면 어떤 주제로 할지 결정되지 않아 고심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상회담 개최를 발표하기 불과 몇 시간 전에 한 이 발언은 참석자들의 ‘고견’을 듣기 위한 것이라지만 외교적 결례가 아니냐는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협상전략이었나?=노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협상은 유연한 자세도 필요하지만, 때로는 (둑을) 막고 (물을) 품듯이 밀어붙이는 것도 중요하다”고 말해 이 발언이 다분히 의도된 것이었음을 시사했다.
서울대 국제대학원 이근(李根) 교수는 “정상적인 프로토콜에 따라서 양국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외교라고 한다면 노 대통령의 발언에 문제가 되는 부분도 있다”면서 “그러나 전략적인 차원에서 발언했다면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본다”고 말했다.
그러나 외교 전문가들 사이에는 정상회담을 앞두고 공개적으로 ‘할지, 말지’ 운운한 데 대해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사람이 적지 않다.
익명을 요구한 외교 전문가는 “할 말이 있다면 정상회담에서 당당히 하면 된다. 입장을 바꿔 한국과의 정상회담에 앞서 다른 나라 정상이 그런 말을 했다면 어떻겠느냐”고 반문했다.
▽직설, 시원하지만 앙금이 문제=노 대통령의 직설은 국내에서도 수차례 설화(舌禍)를 일으킨 바 있다. 하지만 외교 문제와 관련한 직설은 국가 간의 문제를 불러올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다르다.
노 대통령은 지난해 12월 프랑스 소르본대 강연에서 “프랑스에 대해서 우리가 더욱 더 매력을 느끼는 이유는 프랑스 문화가 미국과 다르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발언 서두에서 “섭섭해 할 미국 친구들이 있을지 모르겠다”고 언급하긴 했지만 이런 식의 국가 간 비교는 외교적 결례에 해당하는 것이다.
노 대통령의 이 발언은 즉각 미국 당국자들에게 전파됐다. 올해 초 본보 기자를 만난 미국 관리들은 노 대통령의 프랑스 발언 내용을 보여주며 불쾌감을 토로하기도 했다.
올해 3월 독도 문제로 한일 간에 긴장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나온 노 대통령의 ‘국민에게 드리는 글’도 지나치게 감정을 드러낸 것 아니냐는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노 대통령은 일본을 겨냥해 “각박한 외교전쟁도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이번에는 반드시 뿌리를 뽑도록 하겠다”고 표현했다.
노 대통령은 글 말미에 ‘우리는 승리할 것입니다’라고 썼다가 나중에 ‘우리의 요구는 반드시 역사의 응답을 받을 것입니다’라고 수정했다.
▽퇴로를 남겨야=외교에 있어 직설 어법의 위험은 스스로 퇴로를 차단한다는 점이다. 특히 전망이 불투명한 상황에 대해 단정적 언사(言辭)를 사용할 경우 나중에 해명을 하는 과정에서 ‘말 뒤집기’ 논란에 휩싸일 수 있다.
노 대통령은 3월 8일 공군사관학교 졸업식에서 “우리 군은 동북아의 세력 균형자로서 지역의 평화를 굳건히 지켜 낼 것”이라고 말했다. ‘동북아 균형자론’으로 불리는 이 발언은 미국을 자극하는 등 주변국들에 적지 않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러자 청와대는 지난달 31일 “동북아 균형자론은 일본에서 군비를 합법화하고 강화하는 논의가 한창 진행 중일 때 준비한 것”이라고 발언 배경을 설명했지만 이번엔 일본의 심기를 자극하는 셈이 됐다.
윤영찬 기자 yyc11@donga.com
이정은 기자 light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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