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여년 넘게 초야에 묻혀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 있는 ‘김신조(金新朝·64) 목사’. 그를 다시 불러내는 계기를 제공한 것은 지난 4월 언론에 보도된 ‘1968년 1·21 사태 이후 폐쇄됐던 북악산이 38년 만에 개방된다’는 짤막한 기사였다.
그날 이후 김 목사가 예배를 드리는 경기도내의 S교회를 찾아 그와 그의 부인인 최정화 전도사를 만났다.
다음의 인터뷰는 지난 4개월여간 김 목사를 만나며 그와 주고받은 이야기와 그의 부인인 최 전도사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토대로 쓴 것이다. 글에 나오는 연도는 김 목사가 때어난 1942년을 기준으로 환산해서 썼음을 밝혀둔다. 그는 “스물일곱 살 때…” “마흔 살 때…” 하는 식으로 이야기를 이어갔기 때문이다.
-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 무척 바빠 보이는군요.
“평일에는 수요일 오전 10시, 목요일 오후 8시에 예배를 드리고, 일요일에는 오전 11시에 예배를 드려요. 월요일에는 서울에 있는 S교회에 나갑니다. 예배를 드리지 않는 시간에는 간증하러 다니고 있습니다. 참, 하나가 빠졌네요. 잠들기 전에는 꼭 서재에서 아내와 함께 기도하며 하루를 돌아보고 감사하는 시간을 가집니다.”
-목회자의 길을 걷게 된 사연이 궁금합니다.
“오래 전부터 아내가 교회에 함께 가자고 했지만 안 갔어요. 교회는 나약한 인간들이 가는 곳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 제 마음을 움직인 건 아이들이었어요. 아이들을 보며 교회라는 곳을 달리 생각하게 됐어요. 제 곁에 통 오지 않으려 하고, 늘 주눅이 들어 어두운 얼굴로 지내던 아이들이 교회에 나가고부터는 확 달라졌거든요. 나날이 밝아지고, 공부도 열심히 하고, 제게 살갑게 말도 붙이고, 성격도 활달하게 바뀌었어요. 그게 참 신기했어요. 한 2년간 아이들이 변하는 모습을 지켜보다 아내의 생일을 맞아 교회에 나갔죠. 지금 생각해보면 결혼 후 그때 처음으로 아내한테 괜찮은 선물을 준 것 같아요.”
-교회에 나간 뒤로는 신앙생활이 순조로웠나요.
“그렇진 않았어요. 생각해 보세요. 북한에서는 종교라고는 모르고 살았잖아요. 어린 시절부터 오로지 공산주의 교육만 받아왔는데…. 딱딱하게 굳어버린 제 사고가 쉽게 바뀌었겠어요? 하나님을 만나는 게 쉽지 않았죠.”
-그렇다면 어떤 계기로 하나님을 만나게 됐습니까.
“교회를 다닌 지 1년쯤 됐을 때였어요. 김기동 목사님이 저를 위해 안수기도를 해주실 때 제게 ‘네 몸속에 공비 귀신이 둘 숨어 있다. 그 중 한 명은 머리에 총상을 입었다’고 말씀하셨어요. 그 말을 듣고 정말 깜짝 놀랐어요. 그때까지 어느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거든요. 1968년 1월, 청와대 습격이 실패해 동료 두 명과 북으로 달아났어요. 민간인 복장으로 갈아입은 후 두 명의 동료가 앞장서고 제가 뒤를 엄호하며 북으로 올라갔어요. 그런데 어느 길모퉁이를 돌 때쯤 앞서가던 두 명이 총을 맞고 죽었어요. 그 중 한 명은 머리에 맞았어요. 목사님께서 그 일에 대해 말씀하시며 ‘네 몸 속의 공비 두 명이 너를 죽이려고 했는데 뜻을 이루지 못해 분해하며 나간다고 했다’고 하시는 거예요. 제가 그때 ‘영적 체험’을 한 겁니다.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영적체험’을 한 이후, 목사님의 삶은 어떻게 달라졌습니까.
“그때까 1981년 4월이었어요. 서른아홉일 때죠. 한국에서 지낸 지는 13년째 되던 해였고. 그때껏 남한에서 지내며 몸에 밴 나쁜 습관들을 단번에 없앴어요. 술, 담배, 도박을 모두 끊었죠. 그리고 간증집회에 열심히 다니며 10여 년을 바쁘게 살았습니다. 외국에도 간증집회 하러 갔어요. 캐나다에서는 200여 개의 교회를 돌아다니며 간증집회를 했습니다.”
-1998년에 목사가 되셨을 때 감회가 남달랐겠군요.
“제가 진정한 한 인간으로 태어난 순간이었죠. ‘무장공비 김신조’가 아닌 ‘인간 김신조’로 새로이 태어난 겁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저는 지금껏 세 번 태어난 것 같아요. 한 번은 어머니의 뱃속에서 태어나 북에서 생활했고, 또 한 번은 1·21 사태 때 투항함으로써 남한에서 다시 태어나 ‘무장공비 김신조’로 살았고, 이제는 하나님을 만나 ‘인간 김신조’로 태어나 목회자의 길을 걷고 있죠.”
-부인은 어떻게 만나게 됐습니까.
“제가 결혼하던 1970년 당시만 해도 저는 꽤 유명했어요. 그래서 이름값 한다고 여자들에게서 편지도 많이 받았습니다. 대부분 결혼해 달라는 거였어요. 그런데 하루도 거르지 않고 오는 편지가 있었어요. 발신인 이름도, 주소도 적혀 있지 않았어요. 이상하게도 그 편지를 읽을 때면 용기를 얻게 되고, 진실함이 느껴지더군요. 그렇게 한 5개월 정도 편지를 받았는데, 하루는 마지막 편지라며 자신의 이름과 주소를 적어 보냈어요. 겉봉에 ‘최정화’라고 적혀 있더군요. 즉시 그이에게 남대문 워커힐다방에서 만나자고 답장을 보냈어요. 편지를 읽는 동안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고, 감정적으로는 이미 기울어져 있었어요. 아마도 그때부터 하나님께서 저를 인도하시려고 했나봐요. 아내 덕분에 오늘의 제가 있게 됐으니까요.”
-사모님의 첫인상은 어땠습니까.
“솔직히 좀 실망했어요. 편지에는 얼굴도 예쁘고, 몸매도 날씬하다고 썼는데, 썩 미인은 아니었거든요(웃음). 하지만 마음씨가 참 고왔어요. 아내는 한 주간지에 난 제 기사를 보고 편지를 보내기로 마음먹었다고 하더군요. 그 주간지 인터뷰 때 기자들이 제 소망을 묻길래, ‘장가들어 행복하게 살고 싶다’고 했거든요. 아내는 그걸 보고 위로나 해주자며 편지를 보내게 됐고, 편지가 거듭될수록 위로가 사랑으로 바뀌어갔다고 하더군요.”
-결혼 후 한 가정을 이루고 아이들도 태어났으니 더없이 행복했겠군요.
“그렇지 못했어요. 1·21 사태 때 31명이 남으로 넘어와 그중 한 사람은 살아서 북한으로 돌아갔고, 나머지 30명 중 29명은 죽었잖아요. 저 혼자만 살아남았습니다. 그렇다 보니 너무 외롭고 힘들었어요. 어딜 가든 사람들이 저를 감시하는 것 같아서 타인의 시선이 부담스럽고 두려웠어요. 게다가 전향해서 남한 정부에 협조하고 있었기 때문에 언제 북한으로부터 보복을 당하게 될지도 몰랐어요. 늘 불안했죠. 그리고 밤마다 저 때문에 처형된 부모님, 강제수용소로 끌려간 누님들과 동생들 생각에 너무 괴로웠어요. 불면증에 걸려 잠을 잘 수가 없었어요. 그런 불안감, 두려움, 괴로움을 잊으려고 술을 마셨어요. 매일 술에 찌들어 살았어요. 보통 한자리에서 소주 네 병에, 맥주 스무 병쯤 마셨어요. 담배는 하루에 3갑 이상씩 피웠습니다. 도박에도 손을 댔어요. 제가 서빙고에 있을 때 화투라는 것을 처음 배웠는데, 그때 잠깐 배운 실력으로 5, 6년간 화투에 빠져 살았어요. 집에는 새벽에 잠깐 들어가 옷만 갈아입고 다시 나왔죠.”
-앞으로 남은 생을 어떻게 살아갈 생각입니까.
“제게 죄가 있다면 그건 북한에서 태어났다는 겁니다. 삶의 첫 단추를 잘못 끼웠죠. 이제 목회자로 거듭 태어나서 지금은 세 번째의 삶을 살고 있어요. 한 인간으로, 종교인으로 인생을 잘 마무리하고 싶어요. 늘 겸손하게 사람을 대하고, 어려운 이웃들에게 봉사하고…. 목회자로서 제게 주어진 소명을 다하며 살아가려 합니다.”
<김신조 목사의 삶은 신동아 9월호에 자세하게 수록돼 있습니다.>
김승훈 동아닷컴 기자 hun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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