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력한 용의자인 장-루이 쿠르조 씨 부부의 입국 거부로 자칫 미궁에 빠질 우려가 높아진 서울 반포동 서래마을 ‘프랑스인 영아유기’사건의 수사방식을 둘러싸고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수사 전문가들은 상세한 수사상황이 언론을 통해 계속 외부로 알려진 것과 관련해 “결국 경찰이 주요 수사기밀을 언론에 흘려 용의자의 입국을 막은 꼴이 됐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며 서투른 수사방식을 지적했다.
하지만 수사를 담당한 경찰은 “수사기밀을 여과 없이 보도한 언론이 문제”라며 언론으로 책임을 돌렸다.
수사 진행 과정
그동안 언론에 보도된 경찰의 수사 진행상황과 이에 대응하는 쿠르조 씨 부부의 발언.
#7월 23일= 경찰, 가족과 휴가차 프랑스로 출국했다가 회의 참석차 18일 입국한 쿠르조 씨가 집 냉동고에서 영아 시신 2구를 발견해 신고
#7월 24일= 경찰, 프랑스인 친구 P(48)씨와 필리핀인 가정부 L(49)씨를 유력한 용의자로 보고 수사를 진행하는 한편, 영아들과 쿠르조 씨 DNA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분석 의뢰
#7월 26일= 참고인 신분이었던 쿠르조 씨 프랑스로 재출국
#7월 28일= 경찰, 국과수 DNA 분석 결과 영아들의 아버지는 쿠르조 씨로 확인, 외교 경로 통해 쿠르조 씨에게 조기 입국 요청
쿠르조 씨 프랑스 현지에서 언론을 통해 “영아들의 아빠 아니다” 주장
#8월 7일= 경찰 “영아들의 산모는 쿠르조 씨의 아내인 베로니크(39) 씨다. 베로니크 씨를 유력한 용의자로 추정해서 수사하고 있다. 쿠르조 씨 부부의 조기입국을 위해 국제 형사 사법 공조에 따라 사법 절차를 밟아나가겠다. 쿠르조 씨는 아직까지는 참고인 신분이지만 수사 과정에서 용의자로 신분이 바뀔 가능성도 있다.”
쿠르조 씨 부부 “8월 28일 휴가가 끝나면 예정대로 입국하겠다.”
#8월 8ㆍ9일= 경찰 “베로니크 씨의 체포영장 신청을 검토하고 있다. 자진 입국 혹은 강제 소환 등을 통한 한국 경찰의 직접 조사가 이뤄지지 않는다면 검찰의 지휘를 받아 베로니크 씨에 대한 체포영장을 발부받아 기소중지할 가능성이 높다.”
#8월 10일= 쿠르조 씨 부부 프랑스 검찰 출두 후 혐의 전면 부인하며 “28일 한국으로 돌아가 조사 받겠다”고 거듭 확언
쿠르조 씨 변호 담당 모랭 변호사 “누구 것인지 확실하지 않은 욕실의 머리카락을 갖고 한 DNA 감식 결과는 물증으로 충분치 않다. 경찰이 불충분한 증거를 토대로 사건을 언론에 알리면서 파문이 커졌다.”
경찰 “베로니크 씨가 영아들 유기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한 사실을 입증할 수 있다. 유전자 조사 결과가 잘못됐을 가능성은 사실상 0%다. 베로니크 씨가 자궁적출 수술을 받은 병원에서 확보한 자궁 조직표본 세포를 국과수에 보내 DNA 분석을 추가로 의뢰하겠다.”
#8월 14일=경찰 “추가 검토에서도 베로니크 씨가 유기된 영아들의 어머니인 것으로 판명 날 경우 입건할 근거가 충분해진다.”
#8월 15일=쿠르조 씨 “기자회견을 열어 입장과 한국행 여부 밝히겠다.”
#8월 17일=경찰 “베로니크 씨를 입건해 피의자로 신분을 바꾸겠다. 베로니크 씨가 영아들의 엄마로 확인돼 영아 유기에 가담한 정황이 드러났음으로 처벌은 불가피해 보인다.”
모랭 변호사 “베로니크 씨의 DNA 분석 결과 믿지 못하겠다.”
#8월 22일= 쿠르조 씨 기자회견 통해 영아 유기 혐의 전면 부인하며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프랑스 사법 당국의 조사를 받겠다”고 언급
#8월 23일= 국과수, “쿠르조 씨 부부 주장 일고의 가치도 없다. 영아 부모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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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 수사 잘못이냐 언론 책임이냐
결국 쿠르조 씨 부부가 입국을 거부해 수사가 미궁에 빠지면서 관심은 ‘범인이 누구냐?’ 보다는 ‘용의자가 입국하지도 않았는데 증거와 수사기밀을 중간 중간에 발표하는 것이 옳았는가?’에 모아지고 있다.
쿠르조 씨 부부가 “한국으로 돌아가겠다”는 입장을 밝힐 때마다, 경찰은 이례적으로 “증거는 확보됐다. 체포영장 발부하겠다. 입국하면 처벌하겠다”고 수사상황은 물론 처벌수위까지 언론에 공개했다.
이에 대해 수사 전문가들은 “경찰이 이미 물증을 확보했고, 쿠르조 씨 부부도 자진 입국 의사를 밝혔었다”며 “조용히 수사를 진행하다가 그들이 입국한 뒤 소환해서 증거를 들이댔으면 수사가 쉽게 끝날 수도 있었다”며 경찰의 어처구니없는 ‘아마추어’식 수사를 비판했다. 이들은 경찰의 중간수사 발표가 쿠르조 씨 부부를 쫓은 꼴이 됐다고 지적했다.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곽대경 교수는 “진행 중인 사건의 경우 수사 관련 정보를 유출하면 증거인멸 또는 도주의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공개하지 않는 게 원칙”이라며 “이번 사건은 국민들의 관심이 많고 언론의 취재 열기도 뜨거워 세세한 사항까지 흘러나온 면이 있다”고 지적했다.
경찰대학 김재민 교수는 “언론에 불가피하게 정보가 새나가기도 하지만, 대부분 수사는 외부에 정보를 알리지 않고 조용히 진행하는 게 상식”이라며 “이번 사건은 경찰만의 책임이라고 보기에는 곤란하고 언론도 일정정도 책임이 있다”고 말했다.
같은 대학 이동희 교수도 “중요사건의 경우 비공개가 수사의 기본 원칙”이라며 “수사기관에서 노출하니까 언론에 흘러나가는 것인데 우리나라는 그런 게 사회 분위기상 느슨하게 허용돼온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번 케이스는 언론에 필요이상으로 (수사정보가) 새나간 부분이 있고, 수사관들 중에서도 실적으로 인정받아 공치사를 들으려는 요인이 작용한 것 같다”고 덧붙였다.
이와 관련해 수사를 총괄하는 서울 방배경찰서 천현길 계장은 “언론에 수사 정보를 유출한 적이 없다”며 수사기밀 유출을 강력 부인했다.
그는 사건이 난항을 겪게 된 이유에 대해 “전적으로 언론 책임”이라며 “열흘 이상 2~30명의 기자가 경찰서에 살다시피 하며, 히든카드라고 감춰도 어떻게 알아냈는지 보도해버리고 말았다”고 강변했다.
그는 “어떤 비난이든 감수할 수 있지만 수사 절차와 관련해서는 잘못한 게 없다”고 말했다.
김승훈 동아닷컴 기자 hun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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