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D 권력에서 스타 권력으로’
바야흐로 방송 드라마 주연 배우 출연료 ‘1억 시대’가 열렸다. 최근 한 외주제작사가 한류 스타를 앞세워 투자한 대형 사극의 남자 주연배우 출연료가 편당 1억 원을 육박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인기 드라마의 제작 방식이 바뀌고 있다. 몇 년 전까지 드라마 편성ㆍ제작 전권을 지상파 방송사가 독점했으나, 요즘은 적게는 60%에서 많게는 80% 이상까지 외주제작에 의존한다.
큰 이유는 스타급 연기자 섭외에 외주사가 방송국보다 유리하기 때문. 스타급 연기자들이 소속된 연예기획사가 점차 외주사와 전속 계약하면서 방송사에서 이들에 대한 접근이 어려워지고 있다. 보통 방송 3사가 드라마를 편성 할 때, 외주사에 주는 회당 제작비는 1억 원 내외이고 저작권은 5대 5로 배분한다.
하지만 문제는 불법ㆍ기형적인 드라마의 탄생. 외주사가 제작비를 충당하기 위해 불법 협찬이나 PPL(간접광고)를 악용하고, 출연료를 줄이기 위해서 조연 배역을 줄여 주인공이 ‘고아’이거나 ‘편부 편모’ 슬하에서 성장하는 이력을 갖는 사례가 많다.
더 나아가 연예기획사는 스타급 연기자 출연을 미끼로 외주사에 공동제작이나 신인배우의 배역을 요구하기도 한다. ‘PD 파워’ 시대에서 ‘스타 파워’ 시대로 변모한 것이다.
동아닷컴은 그 동안 이와 관련해 꾸준히 문제점을 제기해온 양문석 언론개혁시민연대 사무처장에게 스타권력과 방송드라마의 제작 실태에 관해 들어봤다. 양 위원은 지난해 한국방송프로듀서연합회가 주최한 토론회에서 자체 수집한 자료를 바탕으로 스타권력이 한국드라마에 위기를 초래하고 있다고 주장해 화제를 모은 바 있다.
다음은 일문일답.
-스타권력 문제를 제기한 한 지 1년 6개월이 지났다. 지금 상황은 어떤가.
방송사 PD들은 상황이 더욱 나빠졌다고 말한다.
-드라마를 이끌어 가는 일부 톱 연예인들이 비상식적인 행위로 촬영장에서 위화감을 조성했다고 지적했는데. (그는 지난해 인기 탤런트 김 모씨와 윤 모씨가 아버지 역의 중견배우 박모 씨가 잔소리를 자주 한다며 교체를 요구한 일, 시청률 1~2위를 다투던 드라마의 주연 남성 배우가 과음으로 번번이 촬영을 펑크 낸 일, 여배우 김 모씨가 바쁘다며 자신의 촬영 분량만 찍고 철수해버려 함께 연기를 펼치던 중견배우 박 모씨가 허공을 보고 대사를 한 일 등을 공개했다.)
“이제 와서 재론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런 정도가 촬영장에서는 일상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일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톱스타들의 비상식적인 행태가 도를 넘었고 싸XX가 배 밖으로 나와서 이마에 띠로 메고 다닐 정도로 엉망진창인 상태이다. 군대에서 고참을 대하듯 깍듯이 선배를 모셨던 중견 연기자들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박탈감을 느낀다고 말하기도 한다. 아예 눈물을 글썽이면서 한결같이 ‘내가 이런 말을 했다는 건 절대 밝히지 말아 달라’고 당부하기도 했다. 무서운 것이다.
알만한 톱스타들이 카메라 감독에게 ‘이렇게 찍어라, 저렇게 찍어라. 내가 시간이 없으니까 나부터 찍고 나중에 합성해서 시선만 처리하라’고 한다. 같은 소속사 후배를 끼워 넣기 위해 다른 기획사 소속 선배를 쳐내거나, 후배들에게 잔소리를 하는 중견 배우를 잘라 낸다. 이런 일들은 제작 현장의 분위기를 해칠 뿐만 아니라 작품의 완성도까지 떨어뜨리고 있다.”
-캐스팅은 전적으로 PD의 권한이 아닌가.
“아니다. 요즘엔 연예기획사가 직접 드라마 수주를 받고 있기 때문에 PD도 주연 배우가 지명한다. PD도 주연 배우에게 낙점을 받지 못하면 평생 드라마를 찍을 수 없는 상황이 도래한 것이다. 일단 주연 3인은 PD가 어쩔 수 없는 것이고, 그 외에 주연급 조연은 주연 배우 소속 기획사와 PD가 기본적으로 합의한 사람에 한해서 결정된다. 나머지 배우들은 PD가 결정하는데 여기에 탤런트실 실장 같은 사람이 캐스팅을 추천하면 반영하는 정도다.”
-왜 이런 일이 초래됐나.
“핵심은 방송사 외주 제작이다. 외주제작사들은 협찬과 PPL을 자연스럽게 하고 방송위원회에서도 상당부분 봐준다. 그런데 내부 제작을 했을 때는 협찬과 PPL문제를 엄격하게 적용한다. 물론 원칙적으로는 PPL은 어디라도 전면 금지다. 협찬과 PPL로 제작비를 올린 드라마와 그렇지 않은 드라마가 경쟁하는 불공정 게임이 제도적으로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드라마를 보다 보면 느닷없이 휴대전화를 들고 침대 위에 드러눕는 장면이 나온다. 기업체 사장으로 설정된 주인공의 집무실에 다들 알만한 모 회사 로그가 뜬다. 문제는 불법 협찬과 PPL이 어떤 규모로 거래되는지는 지는 오직 제작사만 안다는 것이다. 일종의 검은 돈이다.”
-유입된 검은 돈은 톱스타의 개런티가 되는 것인가.
“뭉칫돈은 제작자의 호주머니로 들어가기도 하지만 그 보다는 톱스타들의 개런티에 음성적으로 달라붙는다. 외주 제작사들이 계속적인 수주를 받기 위해선 시청률을 높여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선 톱클래스의 스타들을 캐스팅해야 한다. 보통 드라마 시청률이 15~25%에 불과한 상황에서 캐스팅만으로도 5~10%는 기본적으로 보장 받는데, 누가 그걸 마다하나.
게다가 제작사들은 톱스타들의 개런티를 정확하게 밝히지 않는다. 검은 돈으로 웃돈을 주니 다 탈세로 이어지는 것이다.
또한 톱스타 개런티를 맞추기 위해서 PPL을 꺼내오고 현장 스텝들의 고혈을 짜낸다. 인건비를 깎고 소품과 장비를 줄인다. 드라마를 보다 보면 비가 내려야 할 장면에서 주연 배우 주위에만 비가 온다. 제작비를 줄이기 위해 소방차 3대가 동원돼야 할 장면을 1대로 줄여서 썼기 때문이다. 전반적인 작품의 질은 떨어질 수 밖에 없다.”
-작품의 질이 떨어지는 이유는 외주제작사에서 스타들에게 지나친 대우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인가.
“보통 멜로드라마 제작비는 편당 1억5000만 원 정도다. 제작비의 70~80%가 인건비고 그 인건비의 50~60%를 주연배우 3인이 다 가져간다. 재밌는 점은 95년 SBS 드라마 ‘모래시계’ 이후 훨씬 뛰어난 작품이 나온 적이 있는가 하는 것이다. 외주제작사는 난립을 했지만 드라마 경쟁력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불륜 패륜 노출 삼각관계라는 시청률 공식은 더 강화됐다. 그런데 영화를 비평하는 사람들은 많아도 드라마를 비평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방송 기사만 봐도 ‘주몽이 수염을 길렀다’, ‘황진이가 남장을 했다’ 같은 아주 사소하고 말초적인 것만 나온다. 방송사가 가십꺼리만 보도자료로 만들어 뿌리고 멍한 기자들이 거기 줄줄이 따라갔기 때문이다. 그러니 현장이 변하겠는가. 각 방송사 사장들도 기본적인 경영 마인드가 로또 식이다. 일확천금을 바란다. 다른 부분에 있어 제대로 된 프로그램을 단단하게 만들 생각보다는 ‘한 방이면, 한 방이면’ 하면서 계속해서 외주 드라마에 배팅한다. 그러나 시청률 대박이라는 것도 그렇게 큰 효과가 있는 건 아니다. MBC 드라마 ‘주몽’이 대박이라고 하지만 그 영향력은 겨우 월ㆍ화요일 ‘주몽’ 전후의 3개 프로그램에만 있다. ‘주몽’을 하기 전에 MBC 스포츠뉴스의 시청률이 과도하게 올라간다. MBC 뉴스데스크가 10% 하다가 스포츠 뉴스는 30%가 나온다. KBS 뉴스를 보던 시청률 20%가 그대로 MBC에 와서 주몽을 기다리는 것이다. 그리고 주몽 직후 프로그램까지 시청률의 일부가 남아 있을 뿐이다.”
- 최근 PPL이 남발되면서 지상파 PD와 소품담당자가 구속되고 외주제작사 PD는 불구속 입건됐다.
“받은 돈을 제작비에 보태지 않고 자기 호주머니에 넣은 사람들만 구속됐다. 악질 PD들만 구속된 것이라고 치부해 버리기엔 구조적인 문제가 숨어 있다. PPL문제는 모든 제작자들을 범죄의 구렁텅이로 몰수 있는 것이다. 만약 PD가 아무도 모르게 1000만원 받고 한 치과를 띄어주기 위해 장소 섭외를 했다고 하자. 받은 돈 중 500만원은 개인적으로 착복할 수 있다. 때문에 PPL이 양성화 되거나, 안 된다면 정교한 금지 가이드라인이 나와야 한다. 협찬 문제도 외주와 내부 제작이 동등한 조건에서 제작되도록 방송위원회가 규칙을 마련해야 한다.”
- 스타 권력을 제어할 대책은 없는가.
“다양한 스타를 발굴하기 위해 단막극을 활성화하고 이를 지상파 3사가 동시간대에 편성해야 한다. 방송사들도 하루 한 편씩 드라마를 줄여야 한다. 남는 돈으로 제작비를 더 투여해 제작의 질을 높여야 한다. 드라마 한 개가 줄면 기본적으로 배우 수급이 훨씬 더 폭 넓어져 그 역에 맞는 배우를 캐스팅하기에 훨씬 더 유리해진다. 제한된 스타들에 의한 지나친 몸 값 부풀리기를 제한할 수 있다.”
- 스타권력 시스템이 언제까지 갈 것이라고 보는가.
“외부적 자극에 의해 쇠망치를 맞아야 정신을 차릴 것이다.”
-한미 FTA에 의한 방송시장 개방을 말하는 것인가.
“그건 아니다. 스타권력이 밉다고 한국의 드라마 환경을 망하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한미 FTA에서 편성커트가 없어지거나 한국 협상단이 50/100으로 동의해줄 가능성이 아주 높다. 뉴스와 교양은 의무이고 오락은 방송사에서 유일하게 돈 버는 장르니까 결국 제작비 대비 이윤이 적자인 드라마가 줄어들 수 밖에 없다. 편성 축소는 외주사를 가장 먼저 죽게 할 것이다. 편당 5억 원까지 들인 사극과 수입ㆍ가공비를 1000만원 들인 외화가 모두 20% 전후의 시청률을 보인다면 어느 것을 방송하겠나. 한국의 제작 환경은 황폐화 될 수 밖에 없고 외화가 판칠 수 밖에 없다. 결국엔 톱스타들도 설 자리가 없게 되고 다 같이 공멸하는 것이다. 스타들은 스타대로 제작자들은 제작자대로 전체 드라마 산업을 위해 자제와 절제가 필요한 시기다. 이러다가 임계점이 반드시 온다. 대대적인 현장 스텝들의 파업이 일어나거나 유능한 인재들이 이직해서 드라마 제작 일선에서 빠져나가는 일이 도래하지 않을까.”
최현정 동아닷컴 기자 phoeb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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