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생 및 청소년들의 선호직업 1위 연예인. 가수, 댄스, 연기, 개그맨 등 분야별 공개 오디션장은 10대 연예인 지망생들로 만원을 이루고 방송연예 관련 학과는 전국 136개 대학에 있다. 연예인을 키우는 기획사는 2000여개가 난립하고 있다. 동아닷컴은 각 분야에 걸쳐 힘을 발휘하고 있는 ‘연예인 권력’에 대해 분석하면서 연예인을 지망하는 10대 청소년들을 만나 그들이 생각하는 연예인의 꿈에 대해 들어봤다. <편집자 주>
“흐흐, 너 지영이한테 차였다면서, 진짜야?. 우리 반에 소문 다 났어. 진짜 어쩔 거야.” “너 뭐야. 히히 남자가 팬티가 그게 뭐야. 티 팬티 아냐. 하하 하하. 아 배 아파라. 그게 팬티냐~!”
18일 모 연기학원 저녁반 초급자 강의실. 어두운 객석에는 연예인을 지망하는 중ㆍ고등학생 30여명이 ‘하하 호호’ 웃으며 앉아 있다. 무대 위에는 웃겨 죽겠다는 표정으로 여드름 가득한 소년들이 6㎜ 카메라를 향해 ‘즉흥연기’를 펼치고 있다. 이윽고 ‘컷’ 소리가 떨어지고 “디테일한(섬세한) 생각을 많이 하는 애일수록 더 크게 웃을 수 있다. 그렇게 가자”라는 연기 선생님의 주문이 뒤따른다. 30명의 차례가 다 돌아가자, 이번에는 ‘미안해’를 주제로 즉흥연기를 펼치라는 주문이 떨어진다. 무대위로 올라간 여자아이는 ‘큐’ 사인이 떨어지자, 애처롭게 친구의 이름을 부르며 서럽게 운다. ‘친구가 힘들 때 곁에 있어 주지 못해 미안했다’는 내용이었다. 일상생활에서의 경험을 잘 끌어냈다는 칭찬을 받자, 소녀는 기쁜 얼굴이 되어 무대에서 내려갔다.
◇연기학원의 문을 두드리는 아이들=연예인을 지망하는 아이들은 연기 학원에서 하루 평균 2시간 씩 교육을 받는다. 수강료는 6개월에 240여만 원. 다른 예체능계에 비하면 비슷하거나 다소 저렴하다. 학원에서 화술, 호흡, 발성, 즉흥연기를 배우면 학원과 연계된 매니지먼트 회사를 통해 방송 현장에 단역으로 투입된다. 일종의 현장실습이다. 3~4개월 현장실습이 끝나면 배역 오디션 기회를 얻기도 하고 선별된 학생들은 기획사와 계약해 데뷔하기도 한다. 현재 지상파 3사의 탤런트 공개채용은 폐지된 상태다. 따라서 드라마 외주제작사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주요 기획사에 들어가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러나 워낙 오디션 경쟁률이 치열해 이들이 데뷔하기 까지는 오랜 기다림이 필요하다.
◇기획사 발탁, 데뷔까지 험난한 길=S기획사 오디션에서 떨어졌다는 상급반(연기교육 6개월 이상)의 현준(가명·16)이는 “매주 오디션을 하지만 경쟁률이 엄청나요. 얘들이 되게 많은데, 1번부터 50번까지 함께 들어와서 한꺼번에 오디션을 봐요, 거기서 튀어야 하니 부담스럽죠”라고 말했다. 옆에 있던 예리(가명·16)는 “대개 300~400 대 1의 경쟁률”이라고 거든다.
윤정(가명·15)이는 “제 친구도 Y기획사에서 키워주겠다는 제의가 왔는데, 대신 ‘6년 동안 가수 수업을 해주겠다. 네가 완벽해지면 데뷔할 수 있다’고 했데요. 말이 6년이지, 아예 데뷔 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얘기잖아요. 또 눈이 나쁜데도 ‘렌즈만 껴라’, ‘살을 빼라’ 등의 간섭이 되게 심해요”라고 말했다. 옆에 있던 아이들은 “간섭은 당연한 거 아냐, 걔한테 들인 돈이 얼만데”라고 핀잔을 줬다.
◇“학교수업에 지장 많아 걱정”=소위 ‘뜨려는’ 아이들은 대학입시 공부 역시 소홀히 할 수 없다. 과거 입시에서 실기를 우선시하던 대학의 연극영화 관련 학과들이 3~4년 전부터 좋은 학교 성적을 요구하고 있는 것. 일찌감치 유명 기획사에 발탁된 영재들은 외국어에 입시까지 특별지도를 받고 있지만 그 외의 학생들은 스스로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
하지만 연기를 위해 학교 수업을 아예 빼먹는 일도 흔하다.
“촬영이 있는 날이면 학교 선생님이 공문을 써 주세요. 저희 같은 단역 배우는 하루 종일 수업을 빠지게 돼요. 밤늦게까지 촬영장에 있어야 해요. 촬영에 많은 사람은 일주일에 두 번 정도 밖에 학교에 못 가구요. 보통 한 달에 10번 정도는 수업을 빠져요”
“부모님의 반대요? 그렇다면 아예 이 자리(연기학원)에도 못 있죠. 저희 반에도 연기 공부하다가 부모님이 반대해서 못 온 경우가 꽤 있어요.”
“그래도 어쩔 수 없는 경우가 많아요. 연기가 하고 싶으니까요. 전 아기 때부터 연기자가 꿈이었어요.”
◇“외모에 가장 불만, 더 예뻤으면…”=이들에게 스스로에게 가장 부족하다고 느끼는 것이 무엇인지 물었다. 처음에는 연기력이라고 말하더니, 이내 얼굴이나 키, 몸무게 같은 외모를 들었다. 20여명 상급반 중 단 한 명만이 자신의 얼굴에 칼을 대지 않겠다고 말했다. 윤정이는 “모든 1차 오디션은 사진으로 해요. 포토샵 수정 보지 않은 ‘깡 사진’으로요. 그리고 몸무게 키 이런 걸 적으라고 하구요. 아무리 연기 잘해도 얼굴 안 예쁘면 기회가 오지 않아요”라고 말했다.
다음으로 부족한 것은 외국어나 댄스, 성대모사 같은 ‘특기’. 오디션에서 특기를 해보라고 하면 할 게 없어 창피하다는 것. 선호(가명·16)는 “외국어 대신 돈이 덜 드는 기타를 배우러 다닌다”고 말했다.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에서 권상우가 기타를 친 것이 인상 깊었다고. 영화나 연극에서 기타를 치는 장면이 있으면 도움이 될 것 같아 배운다고 한다. 인영(가명·16)이는 “발레를 배우고 싶었지만 시간 당 15만원이 들어 포기했다”고 말했다.
◇“연예인 되면 성상납, 성희롱 걱정”=‘만약 연예인이 된다면 뭐가 제일 걱정이냐’고 묻자, 뜻밖에 “성상납, 성희롱” 같은 나이답지 않은 답변이 돌아왔다.
선호는 “PD와 여자 연예인 그런 거랑, 여자 작가랑 남자 배우랑 관계 같은 소문이요. 이를 테면 ‘내가 널 출연시켜 주겠으니 내 방으로 와라’하고 키 주면서 오라고 하는 거요. 요즘엔 남자끼리도 자고 그러잖아요”라고 말했다.
한 학생은 “예전에 촬영 나갔는데 감독님이 유독 한 언니에게만 잘해주는 거예요. 저희는 ‘좋게 보셨나보다. 부럽다’ 생각했는데, 나중에 그 언니가 하는 말이 다 같이 버스에 탔을 때 감독님이 언니를 옆에 앉히고 귀 만지고 손으로 이상한 짓 하고 어깨에 기대어 자고 그랬대요. 그리고 전화해서 다음 날 일요일에 만나자고 했대요. 그 언니는 고2였어요” 라고 말했다.
이들은 톱스타가 될 기대는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대신 열심히 해서 진정한 연기자가 되고 싶다고 했다.
상급반 최고령인 한 고2 학생은 “공부에 취미가 없고 대학에는 가야 해서 연기학원에 오는 학생도 있겠지만, 전 옛날부터 제대로 된 배우를 하고 싶어서 여기에 온 거예요”라고 힘주어 말했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연예인이 되고 싶어 할까.
전문가들은 한 명의 스타가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 보다는 스타가 된 다음 겉으로 드러나는 화려한 생활과 수십억 원대의 개런티가 각종 언론매체를 통해 경쟁적으로 보도되는 것이 스타의 환상을 구축하는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여기에 한류스타 ‘보아’, ‘국민여동생’ 문근영 등의 성공도 10대들의 연예인 열풍에 불을 지폈다.
최정일 중앙대 교수는 “아이들 희망이 한정돼 있어 이런 현상이 발생했다”며 “학교 교육이 아이들 스스로의 가치를 생각하게 하고 대중문화뿐 아니라 순수예술에 대해서 관심과 취미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해줘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고 말했다.
▽10대들, 캐스팅 사기 주의사항-MTM 이주덕 본부장▽
22일 서울중앙지검 형사 5부는 “연예인을 시켜주겠다”며 9살 김모 군의 부모 등 총 57명으로부터 5700만원을 받은 혐의로 모 연예기획사 대표 남모(50) 씨를 구속했다.
김태희, 강동원, 한가인, 봉태규 등 상당수 스타들은 각종 인터뷰에서 어느 날 갑자기 길을 가다 캐스팅돼 연예계에 데뷔했다고 말한다. 지금도 명동이나 롯데월드, 지하철 역 등 10대 청소년들이 많이 모이는 공간에선 어김없이 길거리 캐스팅이 이뤄지곤 한다. 그러나 이런 즉흥 캐스팅은 대개 인지도가 낮은 신생 연기학원이나 영세한 매니지먼트 회사가 판촉활동을 벌이는 것으로 보면 된다.
연기자전문교육 및 매니지먼트사 MTM 이주덕 본부장은 “유명한 기획사라든가 정통적인 연기학원은 길에서 명함을 주고 뭘 하진 않는다”며 “길거리 캐스팅을 받은 경우 유명 기획사나 방송사, 연기학원 등 연관업체에 전화 문의해 조금이라도 알아보고 움직이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그는 “길거리 캐스팅 제안을 받으면 누구나 우월감을 갖게 된다. 길거리 캐스팅 매니저들은 ‘전속 연기자’라는 근사한 표현을 쓰고 ‘코디, 매니저를 붙여준다. 출연관리를 해 주겠다’고 솔깃한 말도 한다”며 “그런 업체들은 실제로 방문해보면 외관도 굉장히 멋있게 꾸며져 있는 편”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들은 키워주는 대가로 ‘6개월 정도의 연기 교육을 받아야 한다’며 일반 연기학원 수강료 보다 많은 300만원 이상의 금액을 요구하기도 한다”며 “기획사에서 전속 연기자로 채용할 때는 혜택을 주면서 맺는 것이 일반적인데, 거꾸로 상대방에서 돈을 받으면서 이상한 관리를 하니까 문제”라고 말했다.
그는 “과거 S사 등 몇몇 회사가 문제가 돼 없어졌지만, 최근에 또다시 유사 업체가 판을 친다”며 “그렇게 6~12개월씩 보내고 남는 게 없게 되자 뒤늦게 MTM에 오는 학생들도 더러 있다”고 말했다.
그는 “연기학원은 교육부 허가이고, 방송진출 매니지먼트는 노동부 감독 사항”이라며 “길거리 캐스팅 학원들은 정체가 모호하다. 실제적으로 학원 인가를 못 받고 하는 경우도 있고 일반 매니지먼트사로 설립돼 있으면서 교육비를 받는 곳도 있다. 어떤 법인인지 업체에 대해 잘 알아봐야 한다”고 당부했다.
최현정 동아닷컴 기자 phoeb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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