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파이터, ‘그들은 왜 링에 올라 처절하게 싸울까’

  • 입력 2007년 1월 31일 14시 52분


임수정 선수(좌)와 세리 선수(우)의 진검승부.
임수정 선수(좌)와 세리 선수(우)의 진검승부.
안지혜 선수(좌)와 김현성 선수(우)가 난타전을 주고 받고 있다.
안지혜 선수(좌)와 김현성 선수(우)가 난타전을 주고 받고 있다.
‘여성 파이터’의 세계

28일 오후 7시 30분 ‘2007 네오파이트 10’ 이종격투기 대회가 열리는 서울 송파구 잠실의 롯데월드호텔 크리스탈룸 특설링. 대회장 안팎은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관중은 10대부터 60대까지 남녀노소를 불문했다.

#8:20

예정보다 20분 늦게 경기가 시작됐다. 사회자의 대회 개최 선언과 함께 경쾌한 음악이 울려 퍼졌다. 은색 탱크톱에 핫팬츠 차림의 ‘네오걸(라운드 걸)’ 두 명이 링에 올라 분위기를 달궜다. 이어 선수들이 소개됐다. 여성 4명, 남성 8명 총 14명의 선수들이 차례로 호명됐다. 특전사 출신의 안지혜(26) 선수와 네오파이트 전년도 챔피언인 임수정(22) 선수가 소개될 때는 경기장이 떠나갈 듯한 환호성과 박수가 터졌다. 남성보다는 여성 선수들에 대한 환호가 더 컸다.

#10:05 임수정(한국 삼산이글체육관) VS 사이토 세리(일본 토모에구미)

이번 대회의 메인 경기인 임수정과 사이토 세리(32)의 대결은 시합 전부터 세간의 관심을 끌었다. 세리는 2004년 일본 최대의 여성 격투기 이벤트인 스맥걸(Smackgirl)을 통해 프로에 데뷔했다. 지금까지의 전적은 10전6승이다. 임수정은 이번 대결이 챔피언타이틀 1차 방어전.

사회자가 세리에 이어 임수정을 소개하자 뜨거운 환호성과 함께 여기저기서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다. 임수정의 인기를 실감케 했다. 두 선수의 경기는 2분 3라운드의 입식타격이다.

1라운드 공이 울렸다. 임수정과 세리는 시작부터 팽팽한 접전을 벌였다. 임수정이 한 대 치면 세리가 곧바로 맞받아쳤다. 안면 강타를 몇 차례 주고받았다. 작심한 듯 세리가 갑자기 임수정을 몰아붙였다. 임수정은 순식간에 코너에 몰렸다. 관중석에서는 “안 돼” “빠져나와” “끌어안아” 안타까운 고함이 터져 나왔다. 임수정은 코너에서 빠져나오려고 밀어붙이다 발목을 삐끗했다. 경기는 잠시 중단됐다. 의사의 간단한 진료 후 경기는 속행됐다. 하지만 임수정의 발목은 회복되지 않은 듯했다. 절룩거리며 1라운드를 마쳤다.

관중석에서는 임수정을 걱정하는 소리가 들렸다. “발목 때문에 경기를 무사히 마칠 수 있을까.” “얼굴도 앳돼 보이는데, 왜 저렇게 거친 운동을 하지. 안 돼 보인다.” “엄마는 경기 못 보겠다. 딸이 저렇게 맞는데 어떻게 보겠어.”

2라운드가 시작되자 임수정은 맹렬히 공격을 퍼부었다. 무서운 기세였다. 세리는 저돌적인 맹공에 밀리며 연달아 안면에 강타를 허용했다. 하지만 맷집이 대단했다. 오히려 전열을 정비한 뒤 반격을 가했다.

3라운드에서는 세리가 전 라운드를 만회하려는 듯 매섭게 임수정을 파고들었다. 임수정도 피하지 않고 맞받아쳤다. 치열한 난타전이 오갔다. 관중석도 후끈 달아올랐다. “언니 킥” “발로 차” “얼굴을 때려” 여성 관중들의 응원 목소리가 대회장을 가득 메웠다.

이윽고 경기가 끝났다. 두 선수 모두 프로답게 유감없는 경기를 치렀다. 이날 경기에서 임수정은 세리를 3점차로 이기고 1차 방어에 성공했다.

#9:00 안지혜(통영 정의격투기체육관) VS 김현성(정진체육관)

특전사 출신의 안지혜와 격투기 챔피언 김현성(26)이 대결을 펼쳤다. 사회자가 안지혜의 이름을 외치자 관중석 한쪽에서 “안지혜”를 연호하며 열화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 팬클럽인 듯했다. 반면 김현성 쪽은 조용했다. 안지혜와 김현성의 경기는 2분 2라운드의 입식타격이다.

1라운드 공이 울렸다. 둘은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로 팽팽했다. 서로 얼굴을 치고받는 난타전이 계속됐다. 각 코너에서는 감독들이 목이 터져라 “잡아” “무릎 킥” “빠져나와” 등 작전을 지시했다. 1라운드가 끝나갈 무렵 두 선수 모두 양쪽 볼이 발갛게 부어올랐다.

2라운드에서는 안지혜가 좀 더 공격적으로 나왔다. 팬들은 쉼 없이 안지혜를 응원했다. “안지혜 짱, 안지혜 짱” “초전박살 안지혜”

‘초전박살’이라는 말에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졌다. 팬들의 응원이 힘이 됐을까. 안지혜는 막판까지 맹렬하게 김현성을 몰아붙였다. 결국 안지혜가 2점 차로 판정승했다.

이날 경기는 입식 타격과 그라운드 기술이 허용되는 종합격투기(MMA : Mixed Martial Arts) 등 두 가지 방식으로 치러졌다. 총 7경기 중 여성 대결은 두 경기였다.

“남성 격투기는 너무 폭력적이라서 싫다”

여성이 왜 격투기에 뛰어들었을까. 이들이 격투기에 발을 들여놓게 된 사연은 제각각이다. 다이어트나 몸매 관리를 위해 시작한 경우도 있고, 어릴 때부터 운동을 좋아해서 선택한 경우도 있다. 또 남성의 전유물로만 인식돼온 기존의 ‘편견’을 허물고 싶어 뛰어든 케이스도 있다.

특전사 출신의 안지혜(통영 정의격투기체육관)는 스스로 격투기를 택했다.

안지혜는 31일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어릴 때부터 운동을 좋아했다”며 “중학교 3학년 때 격투기를 배우기 시작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매력에 푹 빠지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격투기에 빠져든 이유에 대해 “격투기는 상대와의 싸움이기 이전에 자신과의 싸움”이라며 “나 뿐만 아니라 주변의 한계 상황에 도전해 이겨낼 수 있는 있는 정신력과 인내심을 길러주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링에 오를 때의 심리 상태에 대해 “두 번째 경기 때까지는 많이 긴장했지만 그 이후부터는 상대 선수를 어떻게 공략할지를 머릿속으로 그려보는 여유가 생겼다”며 “기왕 맞을 거라면 같이 때리고 맞받아치겠다는 각오로 임하기 때문에 두려운 마음은 들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부모님의 눈물을 봤을 때가 가장 마음이 아팠다”고 털어놨다.

“첫 경기 때 부모님을 초청한 게 잘못이었다. 두 분은 경기를 다 보지도 못하고 중간에 나가셨다. 경기가 끝난 뒤 ‘하지 말라’고 말리시며 많이 우셨다. 요즘도 간혹 ‘네가 하고 싶다고 하니 말리진 않겠지만 그래도 안 했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신다.”

여성 격투기에 대한 여성 팬들의 반응도 다양했다.

이진아(18ㆍ서울 강남구) 씨는 “남자 격투기는 너무 폭력적이고 잔인하다. 건전한 스포츠라기보다는 싸움 같다. 그러나 여자 선수들의 경기는 전혀 그런 느낌을 주지 않아서 좋다”고 말했다.

박정민(26ㆍ서울시 성북구) 씨는 “남성들의 전유물처럼 여겨졌던 격투기 세계에 여성들이 진출한 게 신선하다. 격렬한 운동을 하는 여성들을 보며 대리만족을 느끼기도 한다. ‘여자는 약한 존재’라는 편견을 날려 버리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여성 격투기, 2~3년 내 세계 톱 수준으로 성장할 것”

국내 여성 격투기 선수는 두 부류다. 고등학교·대학교·실업팀의 무도선수로 활약하다가 격투기로 전향한 선수들과 합기도·권투·태권도·격투기·무에타이 등 일반 도장에서 수련하다가 실력을 인정받아 출전하는 선수들이다.

아직은 남자 격투기만큼 활성화되지는 않고 걸음마 수준이라고 보면 된다. 일본, 태국 등 여성 격투기가 발달한 외국에 비하면 선수층이 얇다. 이 때문에 특출한 선수가 한 명 배출될 경우 그 선수와 경쟁할 사람이 없어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하는 한계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지금 붐이 일고 있는 만큼 2~3년 내 현재의 여건을 타파하고 세계 톱클래스 수준으로 성장할 것이라는 보랏빛 전망을 내놓았다.

정진우 정의격투기체육관장은 “5~10년 전에 비하면 여성 격투기에 대한 관심도가 크게 높아졌음을 실감한다”며 “우리 체육관만 해도 9명의 선수가 있고 그 중 톱클래스 실력을 갖춘 선수는 4~5명이나 된다. 저변이 점점 넓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네오파이트 전성욱 운영이사는 “국내 여성 격투기는 이제 붐이 일고 있는 상황이지만, 성장이 빨라 2~3년 내 세계 격투기계를 제패할 날이 올 것”이라고 내다봤다.

전 이사는 “국내 남자 선수들이 세계무대에 진출해 성공하기는 어렵다. 외국의 B급 선수와 붙어도 상대하기가 버거운 실정이다. 최홍만 선수는 극히 드문 예라고 보면 된다”면서도 “하지만 여자 선수들은 기량 면에서 탁월할 뿐 아니라, ‘콘텐츠’면에서도 시장성이 좋아 세계와 경쟁해볼만 하다”고 말했다.

김승훈 동아닷컴 기자 hun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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