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교육도 내가…” 아빠들 바짓바람

  • 입력 2008년 1월 7일 15시 05분


이의웅씨가 아들 동현군과 함께 체스를 즐기고 있다. 김재명 기자 base@donga.com
이의웅씨가 아들 동현군과 함께 체스를 즐기고 있다. 김재명 기자 base@donga.com
‘슈퍼 대디’ 사교육까지 챙겨…전문가들 “멘토형이 바람직”

"영수가 거짓말을 했습니다. 집에 혼자 있을 때 게임을 하지 말랬는데, 어제 친구를 데려와 게임을 해 놓고선 시치미를 떼더군요."

김경일(40·S사 과장·서울 강남구 도곡동)씨가 최근 아들 영수(9)의 담임 박 모(29·여)교사를 학교에서 만나 고민을 털어놨다.

"거짓말을 했으니 벌을 줄까요?"라는 질문에 박 교사는 "아이가 저지르는 실수를 일일이 따지다 보면 아이가 바르게 성장하지 못 한다"며 "작은 잘못은 눈감아 주되, 방향이 틀렸다 싶을 때만 바로잡아 주는 게 좋다"고 조언했다.

고민을 해결한 김씨는 학교 운동장에서 아들과 공을 차기 시작했다. 운동을 끝낸 뒤에는 대중목욕탕에 가서 함께 목욕을 하고 집에 와서는 학습지와 학교 숙제도 같이 했다.

회사 일은 고되다. 업무상 술자리도 잦다. 주말에 쉬고 싶은 마음 굴뚝이다. 하지만 김씨는 "자녀교육 역시 또 다른 본업(本業)"이라고 말한다.

●"내 자식은 나 보다 잘 살게 하겠다"

과거 명확했던 엄마 아빠의 역할 구분이 모호해지면서 김씨와 같은 이른바 '슈퍼 대디'(Super Daddy)들이 가장(家長)의 한 부류로 자리 잡고 있다.

고유가 속 계속되는 경기불안, 갈수록 불안해지는 일자리 등으로 아버지들의 어깨가 전반적으로 처지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나도 자녀의 성장에 기여 하겠다", "내가 가진 노하우로 자녀의 경쟁력을 키워주겠다"며 자식교육에 적극 나서는 아버지들이 늘고 있는 것.

이기욱(39·롯데닷컴 차장)씨는 사내외에서 '사교육 정보통'으로 불린다. 올해 초등학교 3학년이 되는 아들 경수를 위해 리서치 하듯 수집한 학원 및 교재정보가 이젠 웬만한 전문가의 수준을 넘어선 것.

이씨는 종종 경수 친구 엄마들의 '초청'을 받아 이들이 모여 있는 집에 간다. 그 곳에서 이 씨는 자녀의 수준과 흥미에 따른 사교육 방법에 대해 '강의'를 한다.

"아빠 시각에서 자녀 교육을 어떻게 직장·사회생활과 연계시켜야 할지에 대해 전업 주부 엄마들이 특히 많이 궁금해 한다"는 게 이 씨의 설명.

회사원 이의웅(40)씨는 지난해 1년간 초등학교 3학년인 아들 동현(10)의 학급에서 '멋진 아빠'로 통했다. 이씨는 휴가를 내서 엄마 대신 아들 학급의 급식당번을 도맡았다.

요즘도 주말에는 동현의 축구 교실에 함께 참여했다. 코치 보조역을 자처하며 장비를 챙기기도 하고 코치와 함께 아이들과 공을 차기도 한다.

그는 사내 야유회나 체육대회, 직원 결혼식 등에도 반드시 동현을 데리고 간다.

"이런 행사에서 아빠가 회사 상사와 동료, 후배들에게 공손하고 따뜻하게 대하는 모습을 보고 '어른들 역시 베풀기도 하고 남의 덕도 보면서 산다'는 것을 아들이 자연스럽게 알게 하고 싶다"는 것이다.

김광웅 숙명여대 아동복지학과 교수는 슈퍼 대디들의 출현에 대해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환영한다.

"영국도 소득이 낮은 계층일수록 부모 역할이 분명하고 상류층으로 갈수록 역할이 모호해 진다. 성격 취향 등을 자녀와 함께 나누고 아들딸에게 남성의 모델이 돼 준다는 점에서 바람직한 현상이다."

●"자녀와 자신을 동일시하지 마라"

영국 옥스퍼드대 자녀양육연구소가 1958년에 태어난 어린이 1만7000명이 33세가 될 때까지의 성장과정을 추적 조사한 결과 이 들처럼 자녀의 성장과 교육에 적극적인 아버지의 자녀들이 학교 성적도 좋고, 사회생활과 결혼 생활도 성공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의 임상심리학자 스테판 B. 폴터는 세상의 아버지들을 △성취지상주의 △시한폭탄 △수동 △부재 △멘토형 등 5가지 유형으로 구분했다.

성취지상주의형의 아버지는 자녀에게 높은 성적과 성공만을 강요해 상처를 주기 쉽고, 시한폭탄형은 자녀에게 신체적 언어적 폭력을 반복한다. 수동형은 바깥일엔 적극적이지만 가정에는 무심한 듯 해 자녀와 유대감이 적다. 자녀에 대해 무책임하기까지 하면 부재형으로 분류되며 자녀는 아빠를 남으로 여긴다.

이 분류에 따르면 한국의 슈퍼 대디들은 상당수가 '인생의 코치' 역할을 하는 멘토형이지만 일부 '성취지상주의형'도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

황상민 연세대 심리학과 교수는 "경기 불안 속에서 치열한 경쟁을 하며 피곤하게 살아야 하는 일부 아버지들이 '내 자식만은 나보다 잘 살게 하겠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당장 지금의 세상에서 살아남는데 필요한 규칙을 자식에게 강요하는 경우가 있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이 같은 교육방식은 당장 눈에 띄는 성과는 있을지 몰라도 장기적으로 자녀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게 황 교수의 지적.

지금 아버지가 물려주는 경쟁력이 20~30년 뒤에는 무용지물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자녀 스스로 자신의 재능을 찾아 발전시키도록 돕는 게 중요하다는 것이다.

황 교수는 이 때문에 "자녀와 자신을 동일시하지 말고 제 3자의 입장에서 자녀의 특성을 파악하고 길을 안내하는 역할을 하는 게 좋다"고 조언했다.

'아버지는 천재를 만들고 어머니는 영재를 만든다'의 저자 노재욱 박사(교육학)도 "엄부자모(嚴父慈母)는 옛말이 됐다"며 "시대 변화에 맞는 아버지가 돼라"고 주문했다.

나성엽 기자 cpu@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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