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여자의 경쟁력]③ 볼보 이향림의 ‘모성적 리더십’

  • 입력 2008년 9월 28일 09시 59분


볼보자동차코리아 이향림(47) 대표 나성엽 기자
볼보자동차코리아 이향림(47) 대표 나성엽 기자
"대변과 차변 값이 다르잖아…."

순간 입사 2년차 후배의 얼굴이 굳었다.

'깨지겠구나', 각오하는 눈치였다.

곧 이어진 이 과장의 말에 그러나 후배의 얼굴은 밝아졌다.

"실수할 수도 있지 뭐, 다시 한번 찬찬히 보고 가져와."

후배가 잠시 후 재무제표를 다시 가져왔다. 대변 차변의 총합은 같은 값으로 표기돼 있었으나 이과장이 다시 한 번 계산하자 이번 역시 일치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후배의 얼굴에는 절망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제야말로 죽었구나'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 과장은 이번에도 후배를 '깨지' 않았다.

"삼세번이라고 하지 않니, 같이 한번 찬찬히 훑어보자."

둘은 그날 함께 밤을 새우며 끝내 완벽한 재무제표를 만들어 냈다.

후배는 "오늘 고생했다"며 어깨를 다독이는 이 과장의 눈을 한동안 응시했다. "죄송하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고맙다"고도 말하고 싶은 생각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눈만 맞췄다.

그 다음부터 후배는 지독하게 모든 결재 서류를 보고 또 봤다. 후배가 이 과장에게 넘긴 보고서에서 오류가 발견되는 일은 그 날 이후 없었다.

●"나는 독한 여자다"

볼보자동차코리아 이향림(47) 대표.

이 대표는 당시 "왜 후배를 나무라지 않느냐"는 주위 동료들의 지적에 대해 "회사 일을 하면서 맹목적인 믿음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고 답했다. 그리고 "그 생각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다"고 강조했다.

수입차 업계 유일한 여성 최고경영자(CEO)라는 수식어를 5년째 안고 사는 그에 대한 주위의 편견은 여전하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거친 남성들과 싸워야 하는 약육강식의 정글에서 여러 사람 밟고 올라선 독한 여자일 것"이라고 말한다.

이 대표는 "나는 독한 여자가 맞다"고 말했다.

"지독하게 사람을 믿는다. 그 때문에 내가 감당해야 하는 일과 스트레스가 많지만 그래도 독하게 사람을 믿는다"는 것이다


▲ 영상취재 : 동아일보 디지털뉴스팀 나성엽 기자

올해 초 볼보의 최고급 럭셔리 세단 S80 시판을 앞두고 이 대표는 스웨덴 본사 임원들과 논쟁을 벌였다.

당시 볼보자동차 코리아는 신형 S80의 가격을 구형보다 820만 원가량 내렸다. 비슷한 시기에 시판된 국산 '제네시스'의 일부 모델보다 오히려 값이 쌌다.

"볼보는 럭셔리 세그먼트 자동차입니다. 그동안 경쟁사에 비해 값이 비쌌던 것도 아닌데 또 내리면 수익이 줄어드는 것 아닙니까?"

본사 임원들의 지적에 대해 이 대표는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했다.

"이 분야 최고 전문가인 볼보 코리아 임직원들이 시장 상황과 앞으로의 성장 가능성 등을 과학적으로 평가해 산출한 가격입니다…."

이 대표는 직원들의 판단은 곧 자신의 판단임을 분명히 했다. 수입차 업체가 한국시장에서 장기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합리적인 가격책정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결국 스웨덴 본사 임원들은 이 대표의 논리에 동의했다.

2003년 1024대, 2004년 1148대, 2005년 1260대, 2006년 1751대, 지난해 2207대….

세계적으로 연간 40여만 대밖에 생산하지 않는 볼보가 한국시장에서 지속적인 성장을 한 것은 2004년 취임한 이 대표와 볼보코리아 직원들의 공이었다.

그런 이 대표와 한국지사 직원들의 의견을 본사가 무시할 수는 없었다.

●"있을지도 모르는 배신에 대비할 수 없다"

볼보코리아 직원들은 자신들이 편하게 업무에 전념할 수 있는 것은 이처럼 이 대표가 '본사로부터 쏟아지는 빗줄기'를 막아주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안다.

이 회사 곽창식(34) 과장은 "사장님이 친 누나 같다는 생각이 자주 든다"고 말한다. 종종 직원들이 일하는 자리를 찾아와 애교 섞인 목소리로 "뭐하니?" "바쁘니?"라고 다정하게 말을 걸어줄 때면 "직장 상사라는 점을 떠나 따뜻함이 느껴진다"는 것이다.


▲ 영상취재 : 동아일보 디지털뉴스팀 나성엽 기자

이 대표가 직원들을 근거 없이, 맹목적으로 믿는 이유는 이렇다.

"직원들이 실력을 키우고 성장해야 회사가 잘 되는 법인데, 이들을 성장시키는 데 믿음만큼 효과적인 방법이 없다."

이 대표가 회사에서 직원들에게 하는 얘기는 집에서 딸(15·중3)에게 하는 얘기와 똑 같을 때가 많다.

"즐겁게 일해라."(직원에게)

"즐겁게 생활해라."(딸에게)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회사가 '돈벌이 공간'이 돼서는 안 된다."(직원에게)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학교가 시험 잘보고 점수 따기 위한 공간이 돼서는 안 된다."(딸에게)

"회사에서 삶의 질이 높아야 한다. 원하는 직무를 할 수 있을 때까지 회사는 끝까지 밀어주겠다."(직원에게)

"삶은 즐거워야 한다. 스스로 좋아하는 것을 찾을 때까지 엄마 아빠는 끝까지 밀어주겠다."(딸에게)

이 대표는 "지금껏 직원들을 100% 믿어왔지만 단 한번도 배신한 직원은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설령 100명 중 1명이 믿음을 저버리고 배반을 한다고 해도,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1명에 대비해 회사 전체 분위기를 가져갈 수는 없다"는 것이다.

볼보코리아 직원 30여명은 첫 직장인 이 곳에서 근무 중인 입사 3~5년차가 대부분이다.

이 대표는 "직원들이 경쟁사 인사팀이나 헤드헌터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를 받는 전화통화를 하고 있는 것을 종종 본다"며 "하지만 알면서도 애써 모른 척 한다"고 말했다.

보다 나은 임금을 보장하는 업체들이 많지만 직원들이 움직이지 않는 이유에 대해 이 대표는 "이 회사에서 일하는 게 즐겁기 때문"이라고 확신했다.

●"마음을 쪼개면 회사, 가정 두 마리 토끼 잡는다"

이 대표의 약력 중에는 특이한 게 있다. 글로벌 기업의 CEO 이면서도 외국 유학이나, 하다못해 현지 어학연수 경험조차 없다는 것.

이 대표는 1984년 이화여대 생물학과를 졸업한 뒤 유학 준비를 했다. 유학에 앞서 영어를 '실전'에서 써 보기 위해 영국계 정유회사 BP에 입사한 게 그의 인생을 바꿨다.

대학 재학시절 2달 간 영어 학원에서 외국인을 만나본 게 전부인 그는 외국인 직원들을 스승 삼아 영어 공부에 매달렸다.

문장을 통째로 외워 그 문장을 쓸 기회를 노리거나 일부러 그런 상황을 만들며 그 문장을 내 것으로 만들어 가는 일에 재미를 붙였다.

그러다 보니 직장생활도 재미있어졌다. "일 잘한다"는 소리도 회사에서 듣게 됐다. '내가 잘하는 게 공부가 아니라 직장생활 같다'는 생각이 들어 유학 갈 마음을 접고 커리어 쌓기에 몰두했다.

크라이슬러 코리아 재무 컨설턴트, 볼보트럭 재무 과장, 차장 등을 거치며 재무통으로 성장했고, 1993년에는 연세대 경영대학원에서 MBA를 받았다.

지금도 그는 영어공부를 계속하며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메모했다가 찾아보는 습관을 유지하고 있다.


▲ 영상취재 : 동아일보 디지털뉴스팀 나성엽 기자

한번도 외국생활을 해 본 적이 없지만 본사 임원들과 영어로 업무 처리에 아무런 불편함이 없을 정도로 영어가 유창해졌다.

"직장 생활을 하기 때문에 가정에는 다소 소홀하지 않겠느냐"는 주변의 우려에 대해 이 대표는 "집에 가면 회사 일을 잊고, 회사에 오면 집안일을 잊는다"고 말했다.

"자신이 어떤 마음을 갖느냐에 따라서 시간을 쪼개듯, 마음도 쪼갤 수 있다"는 것.

여성이 직장생활과 살림을 병행하기 어려운 이유는 "직장에서는 집 걱정을 하고, 집에 와서는 직장 걱정을 하기 때문"이라는 그는 "좀 잔인하게 들리겠지만, 육아가 힘들고 아이에게 죄의식이 느껴지는 여성이라면 직장에 다니지 말라고 얘기해 준다"고 말했다.


▲ 영상취재 : 동아일보 디지털뉴스팀 나성엽 기자

이 대표에 따르면 중 3인 딸은 학교 성적이 "좋지 않다." 하지만 학교 성적 갖고 딸을 나무라지 않는다.

"딸아이가 성적이 좋지 않고 학교 공부에도 관심이 없지만, 살아가는 공부에는 관심이 많다고 생각해요. 그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5녀 중 2녀. "공주님 같은 언니 밑에서 허드렛일하며 동생들을 돌보는 둘째로 자라면서 다져진 성품이 삶에 큰 힘이 됐다"는 이 대표는 "여성들이 쉽게 포기하지 말고, 이도 저도 아닌 '애매한 정신상태'를 버리고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뤘으면 좋겠다"고 말을 맺었다.

나성엽 기자 cpu@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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