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갈곳 없던 때 문씨 3억 기부로 보금자리 마련
버스 안타고 용돈 안쓰고 간식비 아껴 성금 모아
《9일 오후 광주 남구 서동 사회복지공동모금회 전남지회 사무실. 두툼한 점퍼 차림의 10대 청소년들이 쑥스러운 듯 웃으며 들어섰다. 성금 접수창구 앞에 선 이들은 “해남 ‘땅끝’에서 왔다”며 쇼핑백을 내밀었다. 쇼핑백에는 ‘이삭줍기’라고 쓴 빨간색 노란색 돼지저금통 2개와 도넛 모양의 저금통 1개가 들어 있었다. 이들은 머리를 긁적거리면서 “먹고 싶은 것 안 사먹고 한 푼 두 푼 모았다”며 저금통을 하나씩 꺼냈다. 직원들이 저금통을 뜯자 10원, 50원, 100원짜리 동전부터 꼬깃꼬깃 접은 1000원짜리 지폐가 탁자에 수북하게 쌓였다. 모두 35만8670원이었다.》
○ 공부방을 살린 ‘기부천사’
온정이 가득한 저금통을 들고 온 이들은 전남 해남군 ‘땅끝 공부방’ 아이들.
공부방은 엄마나 아빠 없이 할머니 할아버지의 손에서 자란 아이들과 장애우 등 40여 명이 밥도 먹고, 잠도 자고, 숙제도 하는 소중한 보금자리다.
이들이 ‘기부천사’가 된 것은 영화배우 문근영(22) 씨 때문이다.
배요섭(53·땅끝 아름다운교회 목사), 김혜원(43) 씨 부부가 2002년부터 꾸려온 공부방은 3년 전 세든 건물이 매각되면서 쫓겨날 위기에 놓였다.
당시 중년 여성이 찾아와 “아이들을 위한 공간을 마련해 주고 싶으니 적당한 땅을 찾아 달라”고 말하고 돌아갔다. 두 달 뒤 다시 찾아온 그는 “근처 땅을 매입했으니 그곳에서 아이들을 가르쳤으면 좋겠다”며 매매계약서를 내밀었다. 배 씨 부부는 계약서에서 ‘문근영’이라는 이름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이 여성은 문 씨의 어머니였다.
문 씨가 기부한 3억 원(땅값 7000만 원 포함)으로 공부방은 도서관, 컴퓨터실, 목욕탕, 식당은 물론이고 통학 차량까지 갖춘 ‘지역아동센터’로 새롭게 태어났다. 2007년 6월엔 공부방을 찾은 문 씨와 함께 공놀이를 하고 피자를 먹기도 했다.
○ ‘우리도 문근영 언니처럼…’
그 후 땅끝 공부방 아이들은 자신보다 더 어려운 이웃을 돕기 위해 저금통 모금을 시작했다.
중고교생들은 1주일에 한두 번씩 학교에서 공부방까지 6km를 걸어 다니며 버스 요금을 모았다. 정신지체 2급인 최성주(15·송지중 3년) 군은 이름도 제대로 쓸 줄 모르지만 아침에 받은 버스비를 저금통에 넣기 위해 4km가 넘는 길을 걸어 다녔다. 초등학생들도 간식비와 용돈을 아꼈다.
아이들의 사랑을 듬뿍 받은 저금통은 가득 차 갔다. 아이들의 이번 기부는 2007년에 이어 두 번째.
유수아(15·송지중 2년) 양은 “근영이 언니 덕분에 전보다 훨씬 따뜻한 공부방에서 지내고 있다”면서 “많지 않은 액수지만 홀로 사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따뜻한 겨울을 났으면 좋겠다”며 활짝 웃었다.
공부방 아이들의 선행은 이뿐만이 아니다. 지난해 독지가들이 보내온 쌀로 떡을 만들어 경북지역의 한 노숙인쉼터에 보내기도 했다.
아이들의 ‘엄마’로 불리는 김혜원 씨는 “아이들이 저금통에 돈을 모으기 시작하면서 누군가를 도울 수 있다는 생각에 행복해한다”며 “한 사람의 기부가 삭막한 세상에 나눔이란 소중한 씨앗을 뿌렸다”고 말했다.
광주=정승호 기자 shj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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