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칠 때 떠나라'지만 어디 그게 쉬운가. 말 타면 경마 잡히고 싶은 게 사람 마음이다.
그러나 김호 씨(41)는 말 그대로 박수칠 때 떠났다. 대형 PR컨설팅사인 에델만 코리아에서 서른 살에 직장생활을 시작해 서른여섯에 사장이 되었다. 그가 사장으로 일하는 동안 매년 회사는 최고 매출 기록을 갱신했다. 커리어가 절정에 올랐던 2007년, 그는 자진해서 사장을 그만두었다. 지금은 위기관리전문가로 1인 기업인 '더 랩 에이치'를 운영하고 있으며 KAIST 문화기술대학원 박사과정에 재학 중이다.
그가 잃은 것은 타이틀과 고액 연봉. 얻은 것은 삶의 균형과 장기적인 자신 만의 일, 그리고 행복감이다. 그는 "인생 전환으로 인한 변화는 과거의 나로부터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본래의 자기를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말했다. 일에 대해서도 "타이틀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업(業)을 추구하면 직(職)은 따라온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 동시에 찾아온 성공과 위기
2004년은 그에게 잊지 못할 해였다. 성공과 위기가 동시에 찾아왔다. 고속승진으로 사장이 되었지만 같은 해, 이혼의 고통을 겪었다. 성공했으나 행복하지 않았다. 숨 가쁘게 달려온 30대 때, 그에게 가장 두려운 질문은 "취미가 뭐냐?"는 것이었다. 늘 할 말이 없었다.
전환의 계기는 2006년에 찾아왔다. 코엑스 리빙 디자인 페어에서 본 조지 나카시마의 가구 디자인은 그에게 '새로운 발견'처럼 다가왔고, 그는 바로 다음날 사표를 썼다.
"그만둔다는 생각이야 그 전부터 하고 있었지만 정말로 사표를 쓰게 된 데에는 목수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아마 10%는 작용했을 거예요. 세상에 PR 말고도 나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거든요."
그의 전문 분야에서 원하는 일에 전념하기 위해서도 시간이 필요했다.
"사장을 하면서도 연 100시간 이상 기업체 임원들을 대상으로 위기관리 코칭을 해왔는데 회사 경영 때문에 이 일에 전념할 수 없다는 게 늘 안타까웠어요. 사장을 나보다 잘 할 사람은 많겠지만 위기관리 코칭 분야에선 내가 제일 잘 하고 싶다는 욕구도 컸구요."
또 블로그로 대변되는 개인 미디어의 발전 양상과 그로 인해 달라진 여론 형성 과정을 지켜보면서 위기관리의 패러다임을 바꿀 미디어의 변화에 대한 연구도 하고 싶었다.
사장을 그만둔 뒤 그가 이뤄낸 결과를 보면, 그는 이 세 가지 요구를 정확하게 해결했다. 목공예를 배워 가구 9개를 만들었으며 일과 놀이 문화 가족 사이에서 균형을 회복했다. 1인 기업을 만들어 위기관리 코칭에 전념하고 있으며 연구를 위해 KAIST 대학원에 다닌다. 이 깔끔한 전환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 세상의 지혜를 끌어 모으기
"리더십 뿐 아니라 인생 전반에 대해 코칭을 받았어요. 그가 강조한 핵심은 '균형'이었어요. 일과 가족, 문화, 놀이가 삶에서 균형을 이뤄야 하는데 나는 일에 80%가 몰려 있어서 문제라고 늘 지적했지요."
리빙 디자인 페어를 가게 된 것도 이 같은 코치의 조언 덕분이었다.
또 사장을 그만두기 전 구본형 변화경영 연구소가 운영하는 '꿈을 찾아 떠나는 여행'에 참여해 2박3일간 사람들과 함께 인생을 돌아보는 경험을 하면서 공부와 1인 기업을 하자는 꿈을 구체화했다.
박사과정 진학도 사장 시절 프로젝트 때문에 알게 된 KAIST 정재승 교수와 의논하면서 구체화됐고, 회사를 그만둔 뒤 7개월간 하프타임을 갖게 된 것도 1년에 한두 차례 만나는 한 신문사 논설위원으로부터 '삶의 하프타임'을 가질 필요성에 대해 듣고 나서였다.
"다른 사람의 조언을 들으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을 발견하게 돼요. 사람들의 좋은 영향으로 길이 열리는 경우도 많다고 생각합니다. 멘토가 정말 중요해요."
● 좋은 뒤끝. 그리고 하프 타임
그는 실제로 그만두기 7개월 전 사표를 냈다. 회사가 후임자를 새로 구할 시간을 주고 일을 제대로 승계하기 위해서였다. 후임자를 함께 물색했고 새 사장이 정해진 뒤에는 한 달간 함께 일하며 돕고 회사를 떠났다. 이는 나중에 그가 홀로 서기를 할 때에도 평판에 도움이 되었다.
사장을 그만둔 뒤 그는 시간을 온전히 자신에게만 할애하는 '하프 타임'을 7개월간 가졌다. 호주 코치의 권유로 경영과 참선을 접목한 캐나다의 캠프에도 다녀왔고 더블린에서 열린 창조성 워크샵도 다녀왔다. 오래 혼자 지내고, 여행하고 책을 읽었다.
"하프타임은 내 꿈을 찾아가는 과정입니다. 혼자 있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해요. 같은 일을 하는 사람, 익숙한 환경으로부터는 배울 게 별로 없어요. 혼자 낯선 곳으로 떠나야 아이디어도 생성되지요."
조직의 보호막이 사라진 상태에서 하프 타임을 시작하며 그는 처음엔 자격지심이 생기더라고 했다. 자주 가는 식당에서도 대접이 달라진 것만 같았고, 평일 낮에 아파트를 오가다 경비 아저씨를 마주치면 괜스레 민망했다. 그러다 어느 날엔가 평일 오전 10시에 이마트를 가는 데 아무렇지도 않았을 때 "아, 자유다"하는 생각이 비로소 들었다고 한다.
● 'A4 멘탈리티' 벗어나기와 자기 암시
하고 싶은 일에 대한 생각이 처음부터 뚜렷한 사람 같았는데 그는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20대 때도 PR이 제 길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고, 지금 하고 있는 일도 하프타임 때 생각을 구체화했어요. 'From what'이 아니라 'For what'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원하는 것을 찾기 위해 노력했어요."
그 작업을 할 때 그에게 중요한 것은 기록이었다. 머릿속에서만 생각하면 기분에 따라 선택하게 되니까 기록해놓고 계속 들여다보면 균형 잡힌 결정을 할 수 있다는 것. 기록을 할 때에도 'A4' 멘탈리티(mentality)를 벗어나보는 게 좋다고 조언했다.
"컴퓨터의 A4 화면에 갇혀 있으면 생각도 제한되는 면이 있어요. 낯설게 하기를 자꾸 시도해봐야 막힌 생각도 뚫리지요. 저는 줄 없는 노트를 활용했어요. 스케치북에 여러 색 사인펜으로 꿈을 기록하고 그림으로 그려보는 것도 도움이 됩니다."
다른 사람의 조언을 구하고, 하프 타임을 갖고, 스스로 자신의 꿈을 기록한 뒤 남은 일은?
바다에 자신을 던져 넣는 것이다.
"일단 바다에 뛰어들어야 수영을 하는 거잖아요. 너무 꼼꼼하게 계획하면 모험을 하기 어렵습니다."
뛰어들 때 중요한 건 자기암시다.
"가장 맛있는 음식을 먹었던 경험을 한번 생각해보세요. 입 안이 어떤가요? 침이 고이지 않나요? 두뇌는 상상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해요. 상상하면 현실이 됩니다. 뇌가 뭔가를 해야 하겠다고 생각하면 몸의 세포가 그리로 움직이게 되어 있다고 봐요. 무작정 '하면 된다'가 아니라 꿈꾸는 일의 중요성을 말하는 겁니다. 꿈이 있으면 스쳐 지나가는 일에서도 관심사가 눈에 걸리고 자꾸 돌아보게 되고, 그런 것들을 통해 길이 열리는 거지요."
김희경기자 susann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