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타고 떠나자]<7>와인 트레인

  • 입력 2009년 4월 1일 20시 49분


서울역~충북 영동역을 오가는 '와인 트레인'

우아한 분위기에서 유명 소믈리에와 함께 하는 와인 테이스팅. 오가는 기차 속에서 조금씩 맛보는 세계 각국의 유명 와인….

어느 정도 잘 알려진 '와인 트레인'에 대해 상당 수 사람들이 갖고 있는 환상이다. 하지만 실제 와인트레인에 이런 것들은 없다. 그 대신….

오전 9시. 와인트레인이 서울역 플랫폼에 들어섰다. 겉모양만 봐서는 그냥 새마을호다. 다만 중간에 객실 4량만 내부를 개조하고 외관에는 실사 출력물을 붙여 보기 좋게 꾸민 게 차이점.

바(Bar)와 원목 테이블, 회전식 소파 등이 설치된 내부는 아늑하고 조용했다.


▲동아닷컴 임광희 기자

● 와인애호가 보다는 친목여행, 애주가에게 제격

와인 애호가들이 기차 안에서 와인을 천천히 음미할 것이라는 상상은 열차가 출발하자마자 깨졌다.

"지난번에 어떤 손님은 영동 도착할 때까지 약 2시간 동안 무려 9병을 드시고 열차에서 내려 정신을 놓으셨다"는 것이 인솔자의 설명. 그는 "와인은 무한정 제공되지만 각자 주량에 맞게 적당히 드시라"고 권했다.

열차 안에서 제공되는 와인은 충북 영동에 본사를 국내 유일의 와인생산 업체 와인코리아의 '샤토 마니'였다. 와인 코리아는 코레일과 함께 '와인 트레인'을 공동 기획해 운영한다.

승객들의 요구가 있을 때마다 와인은 안주와 함께 무한정 제공된다. 샤또 마니는 '한국산 와인'이라는 자부심을 가질 만 한 와인. 하지만 아직 세계적인 수준과는 거리가 있다는 게 와인 애호가들의 설명이다.

한 와인 전문가는 "와인은 시간이 필요한 산업"이라며 "일정 시간이 지나면 샤또 마니가 언젠가는 세계 수준을 따라 잡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열차 안에서 고급스러운 그릇에 담겨 제공되는 안주는 '고급스러움'과는 거리가 있다. 일반 슈퍼마켓에서 판매하는 과자와 치즈, 땅콩 스낵 등이 은빛 쟁반에 담겨 나온다.

가격을 최대한 낮추기 위한 고육지책으로 보인다.

하지만 친목여행 또는 '와인과 함께 하는 하루의 여유'가 주 목적인 승객들 중 와인의 맛이나 안주의 질을 따지는 사람은 없었다.

충북 영동에 열차가 도착한 뒤 여행객들은 미리 대기하고 있던 관광버스에 올랐다. 다음 행선지는 충북 영동군 영동읍 주곡리의 와인코리아 본사. 오전 11시경 열차에서 내려 본사에 도착하면 12시경이 된다.


▲동아닷컴 임광희 기자
●와인 트레인의 백미, 사물놀이

프로그램 상 점심 식사는 '자율'. 즉 패키지 가격(어른 5만9000원, 어린이 2만9500원)에는 점심 식사가 포함돼 있지 않다.

인근에 '자율적'으로 가 볼만한 식당을 초행길 여행자가 찾기 힘들다는 것이 흠이다. 와인코리아 본사 앞뜰에 마련된 식당에서는 1만2000~2만5000원 짜리 돈가스, 스파게티, 와인불고기, 스테이크 등을 판매하고 있었다. 와인과 샐러드 바는 무료.

그 다음 행선지는 버스로 약 15분 거리인 난계 국악기 체험 전수관.

충북 영동군 심천면 고당리에 위치한 이곳은 와인트레인 프로그램의 백미다.

'난데없이 웬 국악체험이냐', '그냥 가라니까 가지' 하면서 강당에 들어선 관광객들은 이후 30여 분 간 이어지는 즐거움에 푹 빠졌다.

입심 좋은 강사는 미리 마련해둔 북, 장구, 징, 꽹과리 앞에 관광객들을 앉게 하고 국악과 관련된 농 섞인 이야기로 긴장을 푼 뒤 휘몰이 장단 실습을 시작했다. 각 악기별로 장단을 따로 배울 때는 그저 소음으로만 들리던 소리가 4개 악기가 조화를 이루자 가슴 깊은 곳을 자극하는 웅장한 울림으로 다가왔다.

참가자들도 불과 몇 십분 만에 배웠는데 제법 그럴 듯 하게 빚어지는 소리에 신기해하기도 하고 감동하는 표정들이었다.

다시 버스를 타고 와인코리아 본사로 이동하는 길에 들른 곳은 영동군 매천리 늘머니계곡의 '다목적 토굴 저장고'. 와인코리아가 자랑하는 천연 와인 숙성고다.

토굴 안에 들어서면 수백 개의 참나무통이 왼편으로 줄지어 서 있고 오른쪽 편 선반에는 각종 와인 수 천병이 꽂혀 있다.

계절을 막론하고 내부 온도가 섭씨 12도 정도를 유지하고 있으며, 습도도 와인 숙성에 가장 적합한 정도로 유지된다고 한다.

숙성중인 와인 병에는 곰팡이가 먼지처럼 붙어 있었다. 와인숙성 환경이 곰팡이 번식에도 좋은 환경이라고 한다.

이 토굴은 일제 시대 때 탄약 저장을 위해 한국인이 강제 동원되어 팠다고 한다. 가슴 아픈 역사 위로 와인의 향이 짙게 배어 있었다.

다시 버스 편으로 와인코리아 본사에 들른 시각은 오후 3시 반경. 와인 족욕과 와인박물관 관람 등의 일정이 뒤를 잇고 마지막으로 기념품 샵에서 각종 와인과 포도즙 등을 구입하고 나면 오후 5시 경이 된다.

애주가 또는 친목여행객들에게 클라이맥스는 이제부터. 오후 6시경 충북 영동역을 출발한 열차는 지는 해를 뚫고 어둠을 향해 달려만 가고, 무제한 제공되는 와인에 분위기가 무르익는다.

●짧고 굵게…

열차이기도 하고 술집, 노래방이기도 한 공간의 왁자지껄한 분위기는 짧고 강하게 타다가 재가 된다.

종착역인 서울에 도착하면 모두 내려야 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승객들은 마치 시계의 타이머를 맞춰놓고 와인을 즐기는 듯, 서울 역 도착 10여분을 앞두고 차분해졌다. 돌아갈 때가 되었다. 기차에서는 감정과 취기조차 시간표에 따라 움직였다.

예약은 와인코리아 홈페이지(www.winekr.co.kr)에서 할 수 있다.

글· 사진=나성엽기자 cpu@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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