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근히 쓰기 애매한 5만원권, 왜?

  • 입력 2009년 8월 6일 13시 07분


자료사진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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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만원권 수표 발행이 줄었냐고요? 아마 다른 은행 지점들에 물어봐도 저와 똑같은 답이 나올 걸요."

은행명과 지점명을 꼭 가려달라고 신신당부한 한 은행원은 "5만원권 발행 이후 변화"에 대해 묻는 기자의 질문에 "별 차이가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의 당부는 큰 의미가 없었다. 그에 말대로 국민, 신한, 하나 등 서울 시내 주요은행 지점 관계자들은 "10만원권 수표발행이 5만원권 발행 이전과 예전과 거의 같거나 아주 조금 줄었을 뿐"이라는 일치된 답을 내놨기 때문이다.

물론 5만원권이 본격적으로 배포된 지 불과 한달 남짓 시간이 흘렀을 뿐이다. 정확한 통계가 나오거나 국민들의 화폐 소비 행태가 크게 바뀌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다.

그러나 5만원권의 발행 이유의 가장 중요한 근거는 다름 아닌 연간 3000억 원에 이른다는 10만원권 수표발행비용 절감이었다. 때문에 5만원권 신권은 숨어버리고 수표의 굳건한 건재는 조금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다.

● 5만원 신권, 왜 잠자고 있을까?

혹 5만원권의 발행 물량이 부족했던 것은 아닐까?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6월23일 발행된 5만원권은 7월31일까지 모두 8460만 장이다. 금액으로는 4조2291억 원이고 전체 지폐발행금액의 14% 수준에 이른다.

경제생활을 하는 국민당 3~4장은 돌아갔을 만한 물량이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막상 일상생활에서 5만원권 화폐를 사용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무려 35년 만에 등장한 신권에 대한 대중의 호기심이나 발행규모에 비해 시중에서는 은근히 귀하다는 것은 그만큼 널리 확인된다. 업계에서도 "기대만큼 돌지 않는다"고 한 목소리다. 당초 10만원권 수표의 대체제로 기대감을 모은 5만원권의 등장에도 수표 수요가 전혀 줄지 않았다는 것이 그 반증인 셈이다.

① 10만원 수표 대체의 힘겨움

"수표는 분실하면 되찾을 가능성이라도 있지만…"(직장인 한병일 씨)

"현금과 수표는 느낌이나 사용방법이 전혀 다르다."(약사 정철현 씨)

당초 정부와 한국은행은 급격하게 커진 경제규모에 맞춰 10만원권과 5만원권 화폐 두 종을 출시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조금은 석연찮은 이유로 10만원권 발행이 무기 연기되고 말았다. 관건은 5만원권이 수표를 대신할 수 있느냐에 모아졌지만 실망하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게다가 수표의 장점은 은행을 들러야 하는 불편함에도 한번 발행되면 보관이나 전달의 용이함과 신뢰성이 있지만 5만원권은 그 장점을 대체하기에 '애매하다'는 게 주된 이유다.

한국은행 관계자는 "너무 오랜 기간 수표를 써왔기 때문에 단기간에 5만원권이 수표의 기능을 대체하기는 힘들 것"이라면서 10만원권 출시가 불발된 것에 일말의 아쉬움을 표시했다. 5만원 신권이 정착하기 위해서는 익숙해질 시간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② 1만원권 대체의 어려움

직장님 이한석 씨(37)는 7000원이 부과된 택시비를 지불하기 위해 5만원권을 내밀었다가 택시기사로부터 "잔돈이 부족하니 만원권으로 달라"는 퇴짜를 받은 적이 있다. 그 이후부터는 5만원권을 꺼내기가 조심스러워졌다.

5만원권이 소비자들의 지갑 속에서 비상금으로 잠자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크기의 '애매함'에 있다. 5만원권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화폐 소비자가 '적어도 2만원 이상 5만원 내외는 돼야 꺼내기 적정하다'는 인식이 있기 때문.

결과적으로 만원권과 오만원권이 지갑 속에 공존할 경우 만원권만 유통이 되는 현상이 반복되기 때문에 5만원권의 활용빈도가 급감하는 것. 이 같은 상황은 한국은행이 사전에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이다.

③ 신용카드 대체의 불가능

직장인 오한석 씨(35)는 5만원 2장을 지갑에 비상금으로 넣어 다니고 있다. 그러나 지난 한 달간 사용할 일이 전혀 없었다. 그 이유는 만원만 넘어도 어느새 카드를 꺼내 사용하는 습관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5만원권의 최대 경쟁자는 1만원권이나 수표가 아닌 신용카드다. 경제활동 인구당 평균 4,5장씩 발행된 막대한 신용카드 인프라는 5만원권의 유통을 가로막는 가장 큰 걸림돌이다. 유통업계에서는 "이미 신용카드와 현금의 사용 비율이 7 대 3에 이르고 날이 갈수록 그 격차가 커지고 있기 때문에 5만원권은 더욱 천덕꾸러기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말한다.

결국 5만원권은 변화된 경제 시스템을 고려치 않은 '뒷북'일 수 있다는 우려도 그 때문이다.

● 환영 받는 곳도 많다?

그렇다고 5만원권이 시장에서 전적으로 외면 받는다는 얘기는 아니다. 결혼식이나 돌잔치 장례식 등 경조사에서 5만원권은 최고 인기 화폐로 떠올랐다. 또한 경마장이나 강원랜드 등 사행시설에서 5만원권은 최고의 인기다. 때문에 5만원권을 놓고 '경조사, 도박장 전용 화폐'라는 불명예스러운 꼬리표까지 따라 붙었다.

논란은 5만원권이 결국 특권층의 비자금이나 부의 이전용으로 축적되기 때문에 눈에 띄지 않는 것 아니냐는 우려를 불러온다. 애시당초 5만원 이상 고액권은 "뇌물 좋아하는 사람들이나 선호할 위험한(?) 화폐"라는 논란이 있었다. 단적으로 1만원으로 골프백에 2억이 들어갔다면 앞으로는 10억 이상이 들어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자금세탁 방지업무를 하는 금융정보분석원은 고액권으로 거액을 현금으로 거래할 때 주의 깊게 봐달라고 은행 측에 요청한 상태다.

물론 한국은행 측은 이 같은 지적에 대해 "원래 고액권은 회전율이 높은 화폐가 아니다"며 짐짓 여유를 부린다. 1만원은 1973년에 등장했으니 이미 세상에 빚을 본지 35년이 됐다. 아직은 판단을 유보해야 할 때란 얘기다. 그럼에도 5만원 신권이 자리잡기에 편견과 애매함의 벽은 너무 높기만 하다.

정호재 기자 demia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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