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김순덕]구제와 규제

  • 입력 2009년 9월 18일 02시 59분


“건강을 염려해 건강보험을 들면 건강을 해치는 일을 더 하게 된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케네스 애로가 1963년 논문에서 지적한 내용이다. 폐암 걱정 때문에 암 보험을 들고는 어쩐지 든든해져 담배를 끊기는커녕 슬금슬금 더 피우는 식이다. 보험료를 남이 부담할수록 ‘도덕적 해이’는 커진다. 46년 전 애로처럼, 그의 조카 로런스 서머스 미국 백악관 국가경제위원회 위원장도 지금 도덕적 해이에 대한 우려를 하고 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경제교사인 그는 “금융정책에 관여하는 사람들의 큰 관심이 도덕적 해이의 문제”라고 했다.

▷리먼브러더스 파산 1년 만에 ‘카지노 자본주의’가 돌아왔다는 소리가 나온다. 1년 전만 해도 착한 기업으로 개과천선할 것 같던 금융회사들이 벌써 고(高)위험 파생상품을 팔며 고소득을 올리고 있다. 골드만삭스의 엘리트들은 글로벌 위기 이전과 맞먹는 평균 70만 달러의 연봉을 챙겼다. 오바마 대통령이 “정부의 금융 강화 법안에 맞서 싸우지 말고 수용하라”고 금융회사들에 경고했을 정도다.

▷월스트리트표 도덕적 해이는 바로 정부가 퍼준 구제금융에서 비롯됐다는 걸 오바마도, 서머스도 모르는 척할 것 같다. 글로벌 경제를 염려한 미 정부가 든든한 보험 역할로 손실을 막아줬기에 금융회사들이 야금야금 카지노판을 다시 펼친 것이다. 월스트리트만 특별히 사악하다고 할 수도 없다. 우리나라에서도 2007년 2548억 원의 지방공기업 중 최대 적자를 기록한 서울도시철도공사 사장이 2008년 기본급의 556%를 성과급으로 받았다. 지방자치단체 산하 공기업 상당수가 적자 속에서도 과도한 성과급을 챙겼다. 부담은 정부에 떠넘기고 이익만 챙기는 도덕적 해이의 전형이다.

▷일주일 뒤 열리는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서 금융규제를 강화하면 금융계의 도덕적 해이가 사라질까. 금융역사가인 찰스 킨들버거는 “작금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정부가 개입하면 할수록 다음번에 생기는 주식 주택 자산의 거품은 심각해진다”고 했다. 정부가 구제(救濟)든 규제(規制)든, 어떻게든 손해를 줄여줄 것으로 믿기 때문에 시장 참여자들의 도덕적 해이 역시 심각해진다는 것이다. 그게 벌써 30년 전 얘기다. 세상은 달라지지 않았다.

김순덕 논설위원 yu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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