꽁꽁 얼어붙은 한강 빙판과 강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동아일보 보도에 따르면 이날 관중은 무려 5만 여명. 당시 서울시 총인구가 40여 만 명에 불과했으니 엄청난 사람들이 몰려든 셈.
이들이 보러 온 것은 제 1회 조선여자빙상대회. 조선직업부인회가 주최하고 동아일보가 후원한 이 대회에는 가정부인 20명을 포함해 80명의 여자 빙상 선수가 출전했고 이들의 경기 모습을 지켜보기 위해 수많은 관중이 한강 빙판 위 경기장을 겹겹이 둘러쌓다.
댕기머리에 검정색 스타킹과 치마, 털실로 짠 상의를 차려입은 여자선수들은 은반 위를 날렵하게 질주했고 시범경기에 나선 강계 출신 미인 선수 김영선의 모습에 관중들은 환호성을 터뜨렸다.
'피겨 여왕'으로 자리 잡은 김연아. 역대 동계올림픽에서 금 17, 은 7, 동메달 5개를 따낸 한국 남녀 쇼트트랙. 토리노 동계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 남자 500m에서 동메달을 따낸 이강석. 한국이 최근 들어 세계적인 빙상 강국으로 자리 잡고 있다. 하지만 '로마가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았듯이' 한국 빙상이 여기까지 오기에는 80년이 넘는 동안 수많은 빙상인들의 노력이 있었다.
우리 스포츠 역사, 그중에서도 빙상의 역사 속에 특별한 의미와 확실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곳은 평안북도 압록강이다. 이 못지않게 평안남도의 대동강 또한 빙상의 중심 무대였다.
한국 빙상의 첫 시작은 스피드스케이팅. 한국 빙상 첫 스피드스케이팅대회는 1923년 1월 동아일보가 대동강에서 주최한 대회였다. 당시 동아일보는 사회면 한복판에 큼직한 사고를 싣고 '조선의 젊은이들이여 얼음판에 모이자'고 의기를 북돋았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당시 수입스케이트 한 켤레의 값이 엄청 비쌌다는 것. 보통 500여 원이면 작은 집 한 채를 살 수 있었던 그 때 스케이트 화 값은 20원. 요즘 시세로 따지면 약 500~1000만원에 이르는 거금이었다.
빙상 선수들은 거의 전원이 축구나 육상선수 출신이었다. 겨울까지는 공을 차거나 뛰다가 강이나 호수가 얼어붙으면 빙상 선수로 변신해 스케이트화를 신고 은반 위를 질주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때 일본축구대표팀의 일원으로 나가 한국인 최초로 올림픽에 출전했고 1948년 런던 올림픽 때는 한국축구대표팀 코치 겸 선수로 활약했던 김용식도 겨울에는 빙상선수로 이름을 떨쳤다.
빙상이 폭발적인 인기를 끌기 시작한 것은 1930년 1월 25일 조선체육회가 한강에서 주최한 제 2회 전조선빙상경기대회에 여자종목을 처음으로 신설하면서부터였다. 500m와 1500m 두 부문의 여자종목을 만들었고 첫 출전자는 이화여학교의 이혜만 단 한명이었다.
이혜만의 뒤를 이어 평북 강계군(현 자강도 강계시) 출신의 '강계 미인' 김영선이 등장하면서 빙상은 인기 종목으로 급부상했다.
뛰어난 미모에 활달한 성격의 김영선은 서울의 경성보육학교에서 공부하면서 빙상선수로 활약했다. 김영선을 한번 본 사람들은 남자뿐 아니라 여학생들도 그 멋진 모습에 감탄해 너도 나도 스케이트를 타겠다고 나섰고 제 1회 조선여자빙상대회에는 80명이나 선수가 출전할 수 있었던 것.
김영선의 뒤를 이어 역시 강계 출신인 최동주가 등장했다. 최동주는 온순하고 조용한 타입으로 수줍은 듯한 표정으로 빙판 위를 질주하며 관중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1930년대 말에는 이화여전의 손인실이 '은반의 별'로 활약했다.
서울시 인구의 8분의 1을 한강으로 불러 모았던 '강계 미인' 김영선이 있었다면 75년이 흐른 현재에는 지구촌을 들썩이게 만드는 '피겨 여왕' 김연아가 있으니 이 어찌 기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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