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에 장이 선다. 주민들이 북적거리며 눈구경과 흥정이 시작되고 시끌벅적 사람 내음이 풍겨난다. 하이라이트는 마을 어귀에 쿵작거리는 행렬이 나타나면서부터다. 마음이 들떠 먼저 뛰어나가는 아이들을 중심으로 축제분위기는 고조된다.
이 행렬은 누구인가? 다름 아닌 서커스단이다.
우스꽝스러운 옷을 입고 나팔을 불며 앞장선 광대를 시작으로 저글링을 하고 공중제비를 넘는 곡예사들 뒤로는 커다란 코끼리까지 따라온다. 동네에 서커스가 나타나면 그것은 반복되는 일상을 깨는 흥겨운 축제의 상징이었다.
서커스는 그냥 흥겹고 즐겁기만 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 해가 저물고 천막극장으로 들어가 가마니를 깔고 앉아 두근거리며 무대를 본 기억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알 것이다. 서커스의 인상은 '그로테스크' 그 자체다.
● 안쓰러운 느낌을 전한 옛날 서커스
무대 위에 등장한 재주꾼이 늙수그레하면 괜히 안쓰러운 느낌이 들고, 나이어린 아이가 신나게 재주를 넘어도 마냥 안타까운 느낌이 든다. 한바탕 묘기가 신날수록 역설적으로 느껴지는 아련한 슬픔이 서커스 무대에는 배어있다. 그리고 이 많은 사람과 동물을 일사불란하게 부리는 서커스단장은 무시무시한 존재일 것이라는 막연한 두려움을 갖게 된다.
이러한 이미지는 오래된 동화 '피노키오'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도 있다. 제페토 영감이 나무인형 피노키오를 학교에 보내는데 못된 이들의 꾐에 넘어간 피노키오는 서커스단에 잡혀가 감금생활을 하며 재주를 부리고 있는 것이다.
서커스 무대는 상상과 현실이 만나는 놀라운 접점이다. 하늘을 날거나 각종 위험을 무릅쓰며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행위가 넘쳐나 보는 이 스스로의 눈을 의심하게 만든다. 중력법칙을 비웃기도 하고 무시무시한 사자의 입에 머리를 집어넣기도 하니까.
해마다 설과 추석이면 장날 천막이 서던 서커스 전통을 안방극장에서 재확인한다. '지상 최대의 쇼'나 '세계의 서커스' 등 진기명기와 다양한 곡예를 TV를 통해 볼 수 있다. 이 대목이 중요하다. 전자 미디어의 시대가 도래해 집집마다 TV가 보급된 70년대 이후 천막 속 서커스는 사양화의 길을 걸어야 했다. 대한민국 서커스단의 상징이었던 '동춘서커스단'이 바로 산 증인이다.
동춘, '동쪽의 봄'은 창업자의 이름이다. 박동수 제1대 단장의 호를 딴 것이 서커스단의 이름이 되었다. 1925년 창단. 당시는 한창 일제강점기로 조선인들의 삶이 고달프던 시절이었다. 활동사진(영화)이 나와서 그림이 움직이는데 관객들이 놀랐다면, 서커스는 실제로 펼쳐지는 묘기에 감탄을 금치 못하던 때였다.
● 창업자 이름에서 딴 '동춘서커스' 서커스는 당대 최고의 흥행사업이었다. 곡예, 노래, 춤, 코미디, 드라마까지 한꺼번에 제공되는 즐거움의 종합선물세트였으며 엔터테인먼트 백화점이었던 셈이다.
박동춘은 일본서커스단에서 활동하다가 조선인 30여명을 모아 국내 최초의 서커스단을 창설하고 1927년 목포공연을 시작으로 성공가도를 달렸다. 해방을 맞고 6.25전쟁 후 60년대에서 70년대까지가 사업의 절정기였다. 이때 동춘서커스단 소속단원은 무려 250명을 헤아렸다. 하지만 이후 고난의 행보를 걷게 된다.
1980년 연말 국내 컬러TV 방송이 시작됐다. 그리고 명절 때면 서부극과 무협영화를 찾는 이들로 극장가가 붐비게 됐다. 82년에는 프로야구가 출범한다. 국민소득수준이 올라가면서 흔히 3S로 표현되는 스크린, 스포츠, 섹스산업 활성화로 엔터테인먼트 산업은 다양하게 발전한다.
이 과정은 천막과 무대를 공간으로 삼은 전통적 서커스의 몰락과 정확히 반비례한다. 동춘서커스는 84년의 역사 중 후반 30년을 존폐의 기로에서 자존심으로 버텨왔다. 문제는 버티는 것이 생존과 재성공을 보장하는 방법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서커스 산업의 위기는 우리나라의 동춘만 겪은 것이 아니다. 종주국인 유럽과 미국에서도 지역을 돌며 공연하던 대부분의 천막극단이 해체되었다. 하지만 이들 나라에서는 서커스 산업의 자원들이 그저 사라진 것이 아니다. 종합선물세트이던 요소들을 분리하여 새로운 산업으로 리스트럭쳐링하고 노하우를 활용해 나갔다.
서커스 단원들은 노래와 연기가 되면 뮤지컬 무대로 갔다. 영화계와 TV산업으로도 많은 이들이 흡수되었다. 아크로바트는 되지만 외모와 연기가 안 되는 이들은 스턴트맨으로 활약할 수 있었다. 하다못해 라스베가스로 떠나면 많은 쇼 무대에서 댄서가 되거나 광대, 마임이스트, 마술사 등으로 먹고살 수 있었다.
자본주의 논리에 따라 새로운 트렌드를 찾아 떠난 서구 서커스단원과 달리 동구권의 서커스는 국가의 지원을 받아 러시아 볼쇼이나 중국 국립기예단, 북한 기예단처럼 자신의 기량을 닦으며 안정된 지위를 보장받았다.
● 아트서커스로 블루오션 개척한 태양의 서커스
1982년에는 캐나다 출신 곡예사인 기 랄리베르테가 '태양의 서커스'를 창설하여 아트서커스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태양의 서커스는 경쟁으로 사양화된 산업을 블루오션으로 만들어낸 대표적 사례로 세계인의 주목을 받았다. 우리나라에도 이미 내한공연을 하여 '퀴담'과 '알레그리아' 두 작품을 선보이기도 했다.
창업자이자 CEO인 랄리베르테는 억만장자가 되었고 올해 광대를 상징하는 빨간 장난감코를 단채 11일 간 우주여행까지 마치고 돌아왔다. 랄리베르테의 모습 위에 올 11월 문을 닫아야 하는 동춘서커스단 제3대 단장인 박세환 씨의 모습이 겹쳐진다. 그 자신이 곡예사이자 동춘서커스 창업자 박동춘 단장의 양아들이기도 하다.
현재 동춘서커스의 규모는 창업 당시와 비슷하게 줄었으며 그나마 한국인 곡예사는 다섯 명에 불과하다. 무대 위의 귀공자 저글링 박, 동물묘기의 최고 권위자이자 공중묘기까지 하는 김영희, 공중그네타기의 대가 문세진, 외줄타기의 선구자 박선미, 공중을 나는 인어 꽃님이 그들이다. 그리고 서른 명 가까운 중국 출신 단원들이 있다. 동춘은 3억 8000만 원의 부채를 진채 지난 9월 해단할 예정이었으나 외국단원과의 계약기간 때문에 부득이 11월까지 청량리에서 마지막 공연을 하고 있다.
동춘서커스의 해체를 바라보면서 이 사건은 서커스라는 특수산업에 국한된 것이 아니며 동춘이라는 한 브랜드의 고유한 일이 아니라는 문제의식이 든다. 지난 세기에는 산업화라는 이름으로, 또 21세기에는 정보화라는 미명 속에 우리 곁을 떠나가는 사람냄새 나는 아날로그 산업들이 얼마나 많은가?
TV 다큐멘터리 속의 '달인'들을 보면 그들의 재능이 신산업과 맞물리지 못하고 그저 자꾸만 밀려나는 현상이 안타까울 뿐이다. 문을 닫는 동춘의 캐릭터는 낡은 천막과 구슬픈 음악, 그리고 쫄쫄이를 입고 점프하는 무대 위의 얼굴들이다. 100년을 채우지 못한 우리의 서커스, 사라지는 흥행의 역사를 우리는 어디에 어떻게 복원해야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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