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순일의 ‘내사랑 스포츠’]제2의 황새는 누구?

  • 동아일보
  • 입력 2009년 12월 8일 10시 38분


2002년 6월 4일. 한일월드컵 D조 예선 한국-폴란드의 경기가 열린 부산 아시아드 주경기장.

5만 4000여 명이 운집한 관중석 속에서 "우 와~"하는 거대한 함성이 터진 것은 전반 26분이었다.

폴란드 진영 왼쪽에서 이을용이 찬 볼이 낮게 깔려 골문을 향해 날아가는 순간 붉은 색 유니폼을 입은 덩치 큰 선수가 달려들며 볼이 땅에 떨어지기 전 절묘한 왼발 발리슛을 날렸다. 그가 찬 볼은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리버풀의 주전 수문장이었던 폴란드 골키퍼 예지 두데크의 다이빙을 무위로 돌리며 폴란드 골문 왼쪽에 그대로 꽂혔다.

한국의 선제골이자 이날 2-0 승리의 결승골이었다.

골의 주인공은 황선홍(41) 현 부산아이콘스 감독.

그가 터뜨린 이 골이야말로 한국축구가 월드컵 4강 신화를 쓰는 데 기점이 된 결정타였다.

폴란드를 격파한 한국은 미국과 1-1 무승부를 이룬 뒤 포르투갈을 1-0, 이탈리아를 2-1, 스페인을 승부차기 끝에 5-3으로 누르고 4강 위업을 이뤘다.

사실 폴란드 전 이후 한국축구의 승승장구 기세에 가려 황선홍 감독의 이 골은 그늘에 묻힌 감이 없지 않다.

폴란드전에서 유상철의 승부에 쐐기를 박는 두 번째 골, 안정환의 미국전에서의 동점골, 이탈리아전에서의 골든골, 포르투갈전에서 박지성의 결승골, 이탈리아전 설기현의 동점골, 스페인과의 승부차기에서 마지막 키커로 나선 홍명보의 골 등 갈수록 기가 막힌 장면이 연출되면서 첫 골의 감격은 잊혀졌다.

하지만 필자는 만일 황 감독이 첫 골의 물꼬를 이렇게 쉽게 트지 못했으면 한국축구의 월드컵 4강은 쉽지 않았으리라고 생각한다. 또한 2002 월드컵의 최고 주역으로 황선홍을 꼽는데 주저 하지 않는다.

그만큼 큰 국제대회에서 첫 골은 첫 승리에 결정적 기폭제가 되는 것이며 동시에 목표 달성을 위해 가장 중요한 출발점이 된다.

한국은 2010년 남아프리카공화국월드컵 조 추첨에서 B조에 속해 아르헨티나 나이지리아 그리스와 16강 진출 티켓 2장을 다투게 됐다.

리오넬 메시(바르셀로나)라는 현역 최고의 공격수가 이끄는 아르헨티나, 존 오비미켈(첼스)의 나이지리아, 데오파니스 게카스(레버쿠젠)가 버티고 있는 그리스와 맞붙어야 하는 한국축구대표팀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필자는 2002년 당시의 황선홍 같은 노련한 대형 스트라이커가 꼭 필요하다고 본다.

한국축구는 2002 월드컵 이후 세계 어느 팀과 붙어도 막상막하의 경기를 펼칠 정도로 전반적인 실력이 향상됐다. 하지만 항상 큰 국제대회에서 첫 경기를 제대로 풀지 못해 목표를 이루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대형 스트라이커는 일단 체격이 좋아 한번의 몸놀림으로 상대 수비진을 흔들어 놓을 수 있어야 한다. 또한 국제대회 경기 경험이 풍부해 결정적 순간에 득점력이 좋아야 한다.

황선홍 감독은 현역 시절 183㎝, 79㎏의 체격이었다. 여기에 1988년 국가대표가 돼 1990년 이탈리아월드컵, 1994년 미국월드컵에 출전했으며 2002년 월드컵 전까지 A매치(국가대표팀 간 경기) 103경기에 출전해 50골을 기록하고 있었다.

현재 한국축구대표팀에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산소 탱크' 박지성을 비롯해 '떠오르는 별' 기성용(FC 서울)이 있지만 이들은 대형 스트라이커가 아니라 미드필더들이다.

물론 187㎝, 83㎏의 이동국(전북 현대)과 183㎝, 70㎏의 박주영(AS 모나코)이라는 대형 스트라이커가 있다. 하지만 이들은 2002년 당시의 황선홍에 비해 경험이나 노련미가 떨어진다.

황선홍 감독의 현역시절 별명은 황새였다. 성이 황 씨인 데다 다리가 길어서 붙여진 별명이다.

한국축구대표팀은 2010년 6월 12일 오후 8시30분(한국시간) 그리스와 남아공월드컵 첫 경기를 갖는다.

이 경기에서 한국축구의 첫 승리를 이끌 '제 2의 황새'는 누가될까.

거스 히딩크 감독은 황선홍을 '격이 다른 공격수'라는 극찬과 함께 주전으로 기용해 첫 승리의 주역으로 만들었다.

남아공월드컵까지 남은 기간은 6개월. 앞으로 한국축구대표팀 허정무 감독이 가장 고민해야 할 부분이 최전방을 이끌 대형 스트라이커로 누굴 쓰느냐가 아닐까 싶다.

권순일 | 동아일보 스포츠사업팀장 stt77@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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