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툰작가 릴레이 인터뷰]<11>바람잘날 없는 인생 ‘폐인’의 김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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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1월 6일 16시 49분


'폐인', '면식수행', '주침야활'.

각각 '인터넷에 중독된 사람', '라면만 먹으면서 인터넷을 하는 사람', '낮에는 자고 밤에 인터넷을 한다'는 뜻의 신조어다.

2002년 이 같은 신조어로 가득한 만화 '폐인가족'으로 대히트를 치며 웹툰작가로 데뷔한 김풍 작가(본명 김정환·32).

최근 스포츠동아에 '싸드 아일랜드'를 연재하며 인기를 끌고 있으며 네이버에도 '내일은 럭키 곰스타'를 연재하기도 한 그는 그러나 한 가지 일에만 집중하는 '폐인'과는 거리가 멀다.

하고 싶은 일이 생기면 반드시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성격 탓이다. 이 탓에 그는 본의 아니게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기 시작했다.


●댓글을 종이로 받다


중 1때. 당시 1반이던 그는 선생님들을 등장시킨 만화를 직접 그려 교내에서 인기작가가 됐다.

만화 드래곤볼을 패러디한 이 작품에는 선생님들이 손오공, 베지타와 함께 각자의 필살기로 천하제일무도회에 참가한다.

별명이 '인간 수면제'이던 영어 선생님. 만화 속에서 그는 무도 대회에서 계속 얻어맞으면서도 말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말만 하면 상대방이 잠들게 돼 있기 때문. 결국 영어선생님을 때리던 적은 졸음을 참지 못하고 쓰러지고, 영어선생님은 적을 링 밖으로 굴러 떨어뜨려 승리를 거둔다는 식의 내용.

김 작가가 만화를 만들면 '운반책' 역할을 하는 각 반의 친구들이 10반부터 거꾸로 돌려 보고 마지막에 1반 김 작가에게 책을 되돌려 준다.

책 마지막 페이지에는 '다음에는 과학 선생님을 절단내 달라' '미친개도 등장시켜 달라'는 등의 댓글이 달려 있었다.

그러다가 한번은 한 친구가 선생님한테 김 작가의 만화책을 압수당하는 '참사'가 일어났다.

당장 영어선생님에게 불려갔다.

'난 이제 죽었다',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야 임마, 이런 거 그릴 시간 있으면 책을 한 자라도 더 봐라."

영어선생님은 말로만 호통 치고는 매를 들지는 않았다.

"잘못했습니다" 사과를 하고 교무실을 나서려는데 선생님이 뒤에서 그를 불렀다.

"정환아 잠깐만."

"네?"

"그런데 말이야, 정말 내 수업이 졸리냐?"

인터넷이 아닌 오프라인에서 댓글을 받아보는 흔치 않은 경험, 선생님들로부터도 인정을 받으며 인기를 실감한 그는 그때부터 공부에서 손을 뗐다.

●"미술 하지 마라"

"미술 할래요."

"좋은 대학 좋은 학과 나와서 좋은 일자리를 얻어야 한다"는 부모님이 충격을 받고 미대 나온 김 작가의 사촌 누나와 형을 동원해 미대를 가면 안 되는 이유를 조목조목 설명하게 했다.

하지만 사촌 누나는 미술교사였고 사촌 형 역시 대기업 광고대행사 국장이었다.

'자기들은 미술해서 잘 살고 있으면서 왜 나한테는 하지 말라는 거야?'

공부를 완전히 포기한 그는 고 2 기말고사 기간에 한 만화잡지의 공모전에 응모하기 위해 "공부하러 간다"며 거짓말을 하고 독서실에서 만화를 그렸다.

공부는 안하고 그림만 그리는 모습을 본 독서실 총무가 어머니에게 '고자질'을 하면서 이 사실이 들통났다.

한바탕 어머니와 다툰 김 작가는 "그래도 만화가가 되겠다"고 고집을 부렸고, 마지막으로 어머니와 아버지를 설득하기 위해 3장짜리 편지를 썼다.

몇 번을 고쳐 쓴 끝에 김 작가는 가장 설득력 있는 구성을 택했다.

첫 문장에서 '저는 대학을 포기하겠습니다'라는 충격적인 결론을 먼저 제시한 뒤에 논리적으로 차근차근 자신이 대학을 안 가도 되는 이유를 붙인 것.

편지를 받아든 아버지는 그러나 "뭐야? 대학을 안 가?" 첫문장만 읽고는 불같이 화를 내며 편지를 박박 찢었다.

자신이 정성들여 쓴 편지가 찢어지는 모습을 본 김 작가는 순간적으로 가출을 결심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 길로 집을 나와 현관문을 '쾅'소리 나게 닫았다.

그런데 아뿔싸….

초겨울이었는데 너무 흥분해서 그만 반팔에 운동복바지, 슬리퍼를 끌고 나왔던 것.

'쪽팔려서' 들어가지도 못하고 밖에서 벌벌 떨다가 부모님 몰래 다시 들어가는 것으로 생애 첫 반나절간의 가출은 끝났다.

●엉뚱한 데서 배우다

"너 미술은 열심히 할래?"

고 3이 됐을 때 어머니가 이렇게 물었다.

"고 3부터 미술하려면 재수 삼수 각오해야 돼. 그래도 할래?"

어머니와 함께 입시 미술학원을 등록하기 위해 여기 저기 가 봤지만 "너무 늦었다" "재능이 있는 것 같지도 않다" "다른 길을 선택해라" 대답은 모두 한결 같았다.

그러던 중 "그 선생님한테 배우면 1년 만에 무조건 대학은 간다"는 소문이 난 모 학원에 어머니는 김 작가를 등록 시켰다.

백발이 성성한 선생님은 역시나 도사 분위기였고 그 학원에서 열심히 배운 김작가는 수강생 12명 중 2등 소리를 들을 정도로 빠르게 '향상'됐다.

"내가 대학 떨어지면 너희들 다 떨어진다."

김 작가의 얘기대로 그해 그 학원 수강생 12명은 한명도 안 빼고 다 떨어졌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학원 선생님의 기법은 너무 오래됐던 것. 당시에는 부드러운 선이 대세였으나, 학원 선생님은 자신이 대학에 입학할 당시의 테크닉을 전수하며 선을 쭉쭉 뻗게 그리도록 했다.

재수를 하면서는 그림체를 바로잡고, 삼수를 하면서는 실력을 심화시킨 끝에 그는 결국 홍익대 애니메이션학과에 진학했다.

●춤은 1등, 공부는 꼴등

'화려한' 그의 인생은 그때부터 시작된다.

그는 밤마다 서울 강남역 인근의 나이트클럽에 출몰하며 춤실력을 과시했다. 1학년 1년 동안 강의실보다 나이트클럽에서 시간을 보내며 성적표에 F자를 여러 개 찍었다.

그가 나이트클럽 생활을 마친 것은 2학년 1학기 때. 강남의 한 나이트클럽에서 열린 댄스경연대회에서 1등을 한 뒤 '이제부터는 정말 그림에 매진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리고 그는 그림과 동시에 인터넷에도 매진했다.

당시 인터넷 중독자들이 모인다는 DC인사이드에 인터넷에 중독된 채 생활한다는 DC인사이드 회원들을 소재로 '폐인의 세계'를 연재하기 시작해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누가 자꾸 글 쓰는 게시판에 그림을 올리는 거야?"

처음에는 DC인사이드 운영진이 김 작가의 만화가 오를 때마다 삭제했다.

자신의 그림이 자꾸 지워지자 김 작가는 DC인사이드에 "그림을 올리게 해달라"고 부탁했고, DC인사이드 측은 아예 그를 위해 '카툰갤러리'라는 메뉴를 따로 뽑아줬다.

DC인사이드의 카툰갤러리는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놨다.

●'싸이월드가 뭐야?'

2003년 DC인사이드에서 김 작가의 작품을 본 다음 측이 그에게 가족을 소재로 한 '폐인'만화인 '폐인가족' 연재를 의뢰했고 곧이어 '싸이월드'에서도 연락이 왔다.

"한번 회사를 방문해 달라"는 것이었다.

"싸이월드가 뭐야?"

김작가는 같은 작업실에서 일하던 선배 2명에게 물었다.

"미니홈피, 아바타, 스킨 어쩌고 하는데, 무슨 그림을 인터넷에서 돈 받고 파는 거래."

"미친 거 아냐? 컴퓨터 화면으로 보기만 하는 그림을 누가 돈 주고 사냐?"

"완전 '듣보잡' 회사 아냐? 그래도 심심하니까 한번 가 줘 볼까?"

2003년 말경이었다.

"돈 준다니까 그냥 한번 해보자"고 시작한 싸이월드용 스킨 및 아이템 제작을 통해 김 작가는 월 10억원 가량의 매출을 올렸다.

회사와 이익을 분배하는 구조였기 때문에 김 작가가 월 10억원을 다 가진 것은 아니었지만, 그때 번 밑천으로 선배 두 명과 함께 캐릭터 라이센싱 회사를 세울 수 있었다.

그때부터 그는 사업가로 변신했다. 학교는 그만 뒀다.

●사업가로, 배우로… 그리고

그의 폐인 캐릭터가 인기가 높아지자 CF 제의가 들어왔다. 한 초고속 인터넷 업체 광고모델로 카메라 앞에 선 그는 뜬금없이 '연기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하고 싶으면 해야 하는 성격.

2005년 그는 연극판에 뛰어들어 대학로에서 8개월간 연극무대에 올랐다.

만화나 사업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삶에 재미를 느꼈지만 연극을 하려면 연극만 해야지 다른 일을 병행할 수 없었다.

'요즘 김풍 왜 안 보이냐?'

'배가 불러서 만화 이제 안 그리는구먼.'

웹툰계에서 그의 모습이 안 보이자 이미 떠 있는 그의 작품 아래에 이런 댓글이 달리기 시작한 것도 부담스러웠다.

그는 결국 2006년 '폐인가족2'로 웹툰계로 돌아왔다. 이어 '내일은 럭키곰스타'로 인기를 이어갔다. 동시에 회사에서는 애니메이션 시장 진출에 박차를 가했다.

만화는 잘 됐지만 사업은 신통치 않았다.

우선 국내 애니메이션 시장에서 예전의 활력은 찾기 힘들었다. 초등학생들은 학원 다니느라 바빠 오후 5, 6시 과거 만화 황금시간대는 노인 대상 프로가 차지하고 있었다.

방송사들도 그냥 외국에서 싸게 수입해 방영하는 것을 선호했고 비교적 수준이 떨어지는 국내 애니메이션에는 관심을 갖지 않았다.

현실의 벽을 실감한 그는 지난해 초 회사 경영에서 손을 뗐다.

"이것저것 다 해봤더니, 저는 천직이 만화가더라고요."

더 나이 먹고 감 떨어지고 보수적이 되기 전에 자리 잡고 만화가로 살겠다는 김 작가.

마지막으로 앞으로의 포부를 묻고 인터뷰를 끝내려는데, 김작가가 다시 말을 이어간다.

"저, 이런 얘기하면 홍보가 될지 모르겠는데 그냥 할게요. 이나영 주연의 '아빠는 여자를 좋아해'라는 영화가 14일 개봉하거든요? 거기에 저 조연으로 나와요."

-연기, 사업 다 그만두고 만화가 일에만 전념하신다면서요?

"아, 그게요, 연극은 힘든데 영화 조연은 만화 그리면서 할 수 있겠더라고요."

-하긴, 작가님 코도 높고 곧고, 얼굴 각지고, 키 크시고 목소리도 좋아서 배우 해도 좋으실 것 같아요.

"하하하, 감사합니다. 그래도 저는 영화는 본업으로 안 할 겁니다. 저는 만화가예요."

-눈매도 날카로우시고, 가끔 조폭이나 사채업자 역으로 출연 제의가 있겠어요.

"ㅡ.ㅡ+, 인터뷰 끝났으니 사진 찍어야죠? 뿔테 안경 쓰고 찍을까요? 그러면 좀 순해 보이는데…."

나성엽 기자 cpu@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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