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시험에서는 후기를 잘 타서 300점이나 올랐네요. 이제 GRE 공부 그만해도 될 듯." 미국 대학수학능력시험(SAT)이나 미국 일반대학원 입학자격시험(GRE), 토플(TOEFL) 등 시험 준비생들 사이에는 '후기 탄다'는 말이 있다. 문제은행식으로 출제되는 시험에서 기출문제가 많이 등장한 시험을 뜻한다. 단기간 기출문제 위주로만 공부해도 고득점을 얻을 수 있어 문제은행식 시험을 준비하는 학생들에게는 '후기'는 필수가 됐다. 원칙적으로 문제 유출을 금지하고 있는 SAT나 GRE 등의 시험에서 불법 문제유출의 유혹이 큰 것도 이 때문이다.
연세대 대학원에 다니며 미국 유학을 준비하고 있는 이모 씨(26)도 '후기'로 GRE 준비를 했다. 이 씨는 "후기 위주로 가르쳐 시험 적중률이 높기로 유명한 학원 강사에게 수업을 듣고 있는데 강사가 직접 시험을 치거나 친분이 있는 수강생들을 동원해 기출문제를 수집한다더라"며 "GRE 공부를 하는 한국학생들은 대부분 시험 전에 후기 공부를 한다"고 귀띔했다. 토익이나 토플. GRE 학원이 많은 서울 강남 학원가에서는 불법으로 유출한 문제를 모은 기출문제 자료집을 쉽게 구할 수 있다. 인근 복사·제본 업체에서는 SAT, GRE 기출문제를 제본해 팔고 있다.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한 제본업체에서 GRE 기출 자료집을 고르던 김모 씨(24·여)는 "공부를 시작한 지 2주정도 됐는데 기출문제부터 보고 시작하는 게 좋다고 해 왔다"고 말했다.
온라인에서는 기출문제 찾기가 더 쉽다. 국내 토플, 토익, GRE 시험을 준비하는 학생들이 많이 모이는 한 인터넷 사이트 자료 게시판에는 공유를 하려 올려놓은 기출문제가 넘쳐난다. 중국에서 치러진 GRE 시험 10회분 문제와 정답이 깔끔하게 정리돼 올라와 있는가 하면 3년 치 기출문제를 모아 올려놓은 게시글은 조회수가 1만 건이 넘기도 했다. '후기'라는 이름으로 기출문제를 올리고 공유하는 일이 워낙 만연해 있다보니 토익 시험 당일에도 가채점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문제가 완벽하게 복원돼 올라온다. 토익시험을 몇 달째 보고 있는 대학생 박모 씨(25)는 "토익 시험을 보고난 후 해커스 사이트에 들어가 답을 맞춰보는 것은 이제는 상식과 같은 일"이라고 말했다. 대학원 졸업 후 유학을 준비중인 김모 씨(28·여)는 인터넷에 올라온 '후기'를 집중적으로 암기해 7주 만에 GRE 언어영역 800점 만점에 770점을 받았다. 김 씨는 2008년 2월 25일에 일본에서 GRE 시험을 본 후 학원 강사에게 후기를 보내주기도 했다.
불법 문제 유출 자체도 문제지만 단기간에 시험 점수만 올리면 그만이라는 학습 방식 때문에 시험 점수가 진짜 실력으로 이어지지 않는 것도 문제라는 지적도 있다. 종로의 한 학원에 다니며 토플 시험을 준비하는 양모 씨(23·여)도 "한 번에 170달러나 하는 토플 응시료가 부담돼 빨리 끝내자는 생각으로 기출문제 중심으로 공부한다"고 한다. 양 씨는 "일단 고득점을 받아야 하니까 이렇게 공부하는데 막상 교환학생으로 가도 잘 할 수 있을지 걱정"이라며 "높은 점수를 받기 위해 고급 표현 등을 익혀두긴 하지만 시험 대비용으로 배운 영어가 실생활에서도 얼마나 쓸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털어놨다. 신민기기자 mink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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