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순일의 ‘내사랑 스포츠’]서정권과 김연아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2월 16일 14시 17분


미국 영화배우로서 서부극에 가장 맞는다는 평가를 받았던 '하이눈'의 주인공 게리 쿠퍼, 영화 타잔 시리즈의 원조 격인 조니 와이즈 뮬러, 카투사의 여주인공 루비 바레스, 갱스터 영화의 단골 두목을 맡았던 에드워드 로빈슨….

세계 영화의 본거지 헐리우드를 빛낸 미국의 기라성 같은 스타들이 하나같이 좋아했던 운동선수가 있다.

'복싱의 신'으로 불린 서정권.

그가 바로 헐리우드의 스타들이 좋아하는 스타였다.

서정권은 동양인 최초로 프로복싱의 중심지인 미국 뉴욕의 매디슨 스퀘어가든에서 활약할 정도로 1930년대 복싱 경량급에서 최고의 선수였다.

1932년 미국에 입성한 뒤 캘리포니아와 헐리우드를 중심으로 활약한 그의 당시 인기는 하늘로 치솟을 듯 했다.

복싱광이었던 게리 쿠퍼는 아예 1년 치 링사이드 좌석권을 사들여 서정권의 경기가 있을 때면 촬영 스케줄을 제쳐 두고 라도 꼭 경기를 보러 왔다.

190㎝가 넘는 거구의 쿠퍼와 158㎝의 서정권은 나란히 헐리우드 시내를 걸어 다니며 밥도 먹고 얘기도 나눴는데 이럴 때면 어김없이 카메라맨의 플래시가 터질 정도로 매스컴의 관심도 집중됐다.

조니 와이즈뮬러의 부인 루비 바레스는 멕시코 출신답게 열정적으로 서정권을 응원했는데 경기 후 바레스가 링 위로 올라와 서정권에게 정열적인 키스를 퍼붓는 사진이 각 신문에 게재되곤 했다.

'은막의 여왕 루비 바레스, 꼬마 권투왕과 열애에 빠지다'라는 제목으로 두 사람의 관계가 신문 가십난에 실리기도 했는데 바레스는 서정권의 친구 조니 와이즈뮬러의 부인일 뿐이었다.

정작 서정권은 나니 디보디란 여배우와 염문을 뿌렸다.

이처럼 일제 시대 단신으로 미국에 건너간 서정권은 두 주먹만으로 대단한 인기를 구가했다.

서정권은 전남 순천에서 한 해 4천 섬 이상을 거둬들이는 부농의 4남 3년 중 셋째로 태어났다. 체구가 왜소했지만 빠른 스피드에 돌주먹을 지녔던 그는 일본으로 진출해 1932년 27전 전승(12KO)을 기록했다. 서정권의 전승 신화는 일본 복싱사에 깨지지 않는 불멸의 대기록으로 남아 있고 그래서 그에게는 '복싱의 신'이라는 칭호가 주어졌다.

미국에 진출해서도 승승장구하던 그는 헐리우드를 거쳐 1934년 뉴욕 매디슨 스퀘어가든으로 진출했다. 그의 경기는 흥행 보증수표여서 6만의 관람석이 꽉 찼고 뉴욕 신문들은 메이저리그 홈런왕 베이브 루스, 프로복싱 헤비급 챔피언 조 루이스와 같은 비중으로 서정권의 기사를 다뤘다.

서정권은 미국 정부의 특례로 비자를 7번이나 연장했으나 결국 1935년 43전 39승(12KO)3패2무의 기록을 남기고 미국을 떠났다.

일제 치하의 한국으로 돌아온 서정권은 다시 미국으로 가는 것을 극구 만류하는 부친의 뜻을 꺾지 못하고 1936년 링을 떠났다.

미국을 무대로 복싱 사상 가장 화려한 커리어를 남긴 서정권은 1984년 73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밴쿠버 동계올림픽이 한창인 요즘 미국의 유력지인 뉴욕 타임스가 연이어 '피겨 여왕' 김연아(20·고려대)에 대해 집중 보도를 하고 있어 화제가 되고 있다.

뉴욕 타임스는 12일자 올림픽 특집판에서 김연아에 대해 2개면에 걸쳐 자세하게 보도한 데 이어 14일자에서도 스포츠 섹션 톱기사로 김연아에 대해 집중 조명을 했다.

뉴욕 타임스 외에도 70개국의 각종 언론사에서 김연아에게 인터뷰 요청이 쇄도하고 있지만 김연아를 지도하고 있는 브라이언 오서 코치가 차단하고 있다고 한다.

있는 실력이 어디 가겠는가.

평소대로만 하면 김연아가 이번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고 진정한 '피겨 여왕'의 자리에 오를 게 분명하다.

1930년 대 인기 돌풍을 일으켰던 서정권과 80년 가까운 세월이 흐린 지금 세계적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는 김연아.

한국인으로서의 자부심을 더욱 갖게 하는 두 스포츠 영웅이다.

권순일 기자 stt77@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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