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방송사 입사와 동시에 가장 빨리 스타가 될 수 있는 진로를 보장받은 직군이 아나운서다. 방송에 적합한 재능을 갖고 있다면 경험과 업적이 부족하더라도 "지적이고 재능 있을 뿐만 아니라 아름답다"는 극찬을 받으며 유명인 반열에 오를 수 있다.
매년 치솟는 경쟁률로 인해 대학 취업가에서 공중파 아나운서 시험은 "미스코리아보다 어렵다"는 평가가 나온다. 방송국 관계자들은 "한마디로 한국에서 시험을 통해 셀러브리티가 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규정한다. 일종의 '명사(名士) 고시'인 셈이다.
이는 TV 화면이 화려해지면서 방송국의 간판이 메인 뉴스 앵커나 기자에서 점차 아나운서로 옮겨간 현상과 떼 내어 설명할 수 없다.
얼마 전 막을 내린 2010 밴쿠버 겨울 올림픽에서는 심야 하이라이트 방송을 진행한 SBS 박선영 아나운서가 시청자들로부터 '밴쿠버의 여신'이란 호칭을 받으며 스타로 떠올랐다. 황현정 백지연 장은영 한성주 김주하 최윤영 노현정 강수정 등 수많은 스타 아나운서들은 각종 가십 기사를 양산하며 여성 아나운서의 위상과 기대치를 높이기도 했다. 그만큼 여성 아나운서의 역할과 위상이 만만치 않다는 얘기다.
▶ KBS의 확실한 간판으로 성장한 이지애 아나운서
스타 아나운서의 탄생은 사회의 전반적인 문화를 반영한다. 수많은 아나운서 가운데 그 시대 분위기를 반영한 인물이 스타로 떠오른다. 그렇다면 현재 공영방송 KBS의 간판 아나운서로 누구를 꼽을 수 있을까.
한동안 여성미와 지성미를 앞세워 KBS 대표 아나운서로 회자되던 '3황(황수경-황현정-황정민) 체제'의 여운이 길었기 때문인지 최근에는 김경란(33) 아나운서 이외에 뚜렷한 스타 아나운서가 치고 나오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최근 이지애(29) 아나운서의 급부상은 누구라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1981년생으로 2006년 KBS에 입사한 이 아나운서는 지난해 말부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상상더하기'를 거쳐 스타로 발돋움 했고 현재만 해도 '6시 내고향' '오천만의 아이디어' '일요스포츠 쇼' '이지애의 상쾌한 아침' 등에서 조용하지만 특유의 화사한 미소로 시청자들의 시선을 독차지 하고 있다.
정보전달 프로그램부터 스포츠뉴스와 하이브리드 성향의 예능 프로까지 다양한 장르를 섭렵한 그녀의 최근 위상을 짐작할 수 있는 프로는 2009년 10월 시작한 심야 토크쇼 '이야기쇼 락(樂)'이다.
화요일 밤 12시 45분이란 늦은 시간에 방영하는 이 프로그램은 여러 측면에서 획기적인 포맷을 지향한다.
무엇보다 실력과 예능을 겸비한 한류스타들이 대거 등장한다. 20회를 맞이한 현재 지나간 출연진을 살펴보면 장나라-김선아-조관우-정준호-장혁-윤아-윤손하-신현준 등 각 분야의 정상급 스타들이 출연했음을 알 수 있다.
흥미롭게도 이 토크쇼는 자극적인 가십성 소재를 빼고 진행자의 부드럽고 화사한 이미지를 연상케 하는 '소프트한 대화'로 방송 시간을 채우고 있다. 기존의 황금시간대 토크쇼들이 시청률을 위해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터뜨리고 보는' 옐로우 토크라면, '이야기 쇼 락'은 출연자나 시청자 모두를 편안하게 만들겠다는 모토를 내건 듯 보인다.
출연자들은 수더분하게 나와 일상적 대화를 나누는데 그치지 않고 '나만의 재능'을 뽐내기도 한다. 기존의 예능프로그램을 세련되게 차용한 셈이다. 직접 음식 재료를 펼쳐놓고 요리를 하고, 노래를 부르거나 악기 연주도 한다. 제작진은 정적인 대화 장면 외에도 미리 다양한 영상을 준비해 출연진을 멋지게 포장하는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과거 심야 시간대 토크쇼는 어르신들이 출연해 회고조 대화를 나누는 것이 주를 이뤘다. 하지만 '이야기 쇼 락'은 시청률과 광고 압박이 덜한 시간에 깨어있는 젊은 세대를 겨냥해 아주 편안한 토크 프로그램을 만들어내는 실험을 했다. ▶ 신선한 포맷의 심야시간 토크쇼의 탄생 그러나…
이 같은 신선한 프로그램의 안방마님으로 이지애 아나운서를 내세웠다는 점은 '아나운서의 영역 개척'이라는 점에서 다양한 의미를 지닌다.
기존 여성 아나운서들의 최대 고민은 20대 중반에서 30대 초반에 이르는 짧은 전성기 동안 자신의 역할 모델을 세워야 한다는 부담감이었다. 때문에 급속하게 만들어진 위상과 고된 방송 환경간의 이질감을 느끼게 되면 정년에 구애받지 않고 결혼이나 이직을 내세워 자리를 뜨는 것이 관례화 돼 있었다.
또한 엄숙한 뉴스와 가벼운 연예 프로 사이에서의 갈등도 없지 않았다. 일부 아나운서는 기자를 따라 했고 또 한 부류는 연예인으로 나서기도 했다. 이는 아나운서의 영역 확장이라는 긍정적 평가와 심각한 직역 파괴라는 비판을 모두 불러왔다.
'이야기 쇼 樂'을 통해 선보이는 이지애 아나운서의 탁월함이란 연예인과의 빈번한 만남을 통해 쉽게 망가질 법도 한데 '방송을 전파하고 진행한다'는 전통적인 아나운서의 미덕을 포기하지 않는 다는 점이다.
이제 방송 5년차에 불과하지만 이지애 아나운서는 자신의 직업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 적이 있다.
"사람과 사회를 이어주는 '다리'와 같은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사회를 거울삼아 세상을 바라봅니다. 거울을 들여다보기만 하는 신데렐라가 되기보다 희뿌옇게 흐려진 거울을 닦아낼 수 있는 '뽀얀 물수건' 같은 존재가 되고 싶어요."
때문에 이지애 아나운서의 인터뷰는 모나지 않고 포근한 인상을 풍기면서도 지루하지 않다. '뉴스형 아나운서'와 '셀러브리티형 아나운서'의 적절한 조화인 셈이다. 그녀의 존재감 때문인지 토크쇼 출연을 꺼리는 정상급 스타들도 이 프로그램에 대한 반응은 호의적이라는 후문이다.
물론 '모나지 않은 인터뷰'란 양날의 칼이다.
일각에서는 "이 토크쇼의 주인공이 출연자가 아닌 이지애 아나운서"라는 평가도 나온다. 화사한 그녀의 모습에 시청자들은 쉽게 시선을 빼앗기기 때문이다. 연예인보다 더 화려한 인터뷰어의 의상에 대한 지적도 없지 않다.
그럼에도 '이야기 쇼 락'은 이지애 아나운서로 대표되는 '하이브리드형 아나운서'의 성장 코스로 활용될 가능성이 높다. 시청자들이 언제까지 이 같은 편안함만을 추구하는 토크쇼에 만족할지는 미지수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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