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나의 프레임 vs 너의 프레임
“아이들이 먹을거잖아 유모차 끌고나간 절박함 왜 그걸 이해못해!”
“美쇠고기 수입 싫다지만 위험한 시위에 아기를…그게 엄마야?”
《천안함, 세종시, 4대강, 무상급식, 촛불시위…. 한국 사회를 들끓게 하는 각종 논쟁들. 하지만 이런 논쟁이 정치권에서만 벌어지는 것은 아니다. 친구와 담소를 나누다가, 아버지와 TV를 보다가, 때론 어처구니없게도 길에서 낯선 사람들과 논쟁에 휘말리기도 한다.
동아일보는 특별취재팀의 이진구 사회부 기자와 그의 여자친구 간 대화를 싣는다. 이 기자는 대체로 사회현안에 대해 보수적인 견해를 갖고 있는 편이다. 반면 여자친구는 진보성향이다. 이 때문에 둘은 갈등하며 때로는 심한 언쟁을 벌이기도 한다.
본보가 ‘대한민국, 공존을 향해’ 특별기획시리즈에 두 사람의 대화를 싣기로 한 것은 일상에서 벌어지는 논쟁을 통해 소통의 가능성을 찾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 기자는 “이 기사를 준비하면서 스스로를 되돌아보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입버릇처럼 남에게는 ‘대화와 소통’을 요구했지만, 나도 이미 판단을 하고 그에 맞는 사실만 수용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고 털어놓았다.》
“참여연대가 유엔에 편지 보낸 것 어떻게 생각해?”
또 시작됐다. 보수와 진보의 갈등. 이런 대립은 서울광장이나 국회, TV 토론에서나 있지 데이트 중에도 일어날 줄은 몰랐다. 공공기관에서 일하는 그녀는 의외로 진보적인 성향을 가졌다. 양심적 병역거부를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4대강 사업은 환경파괴가 심하다는 이유로 반대한다. 진보신당을 지지하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좋아한다. 나는 군대는 누구나 가기 싫어하는 곳이기 때문에 예외를 인정해서는 안 된다는 쪽이다. 한나라당을 지지하지는 않지만 성향이 비슷하다고는 생각하고, 말은 노 전 대통령이 지향했던 가치는 인정하지만 방법이 서툴렀다고 해도 솔직히 속마음은 그가 싫었다.
이런 성향의 차이 때문에 토론이 논쟁이 되고, 싸움으로 번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이렇게 명백한 사실을 왜 인정하지 않지’ 하고 답답해하면서도 나도 그녀의 주장을 수용한 적은 거의 없는 것 같다. 여야, 보수단체와 진보단체의 대립을 보며 ‘참 답답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지만 서로 보고 싶은 것만 본다는 점에서는 별 차이가 없는 셈이다.
○ 프레임(frame·틀)
오늘 논쟁은 지난달 중순 참여연대가 유엔에 정부의 천안함 조사 결과에 의혹을 제기하는 서한을 발송한 것이 발단이 됐다. 특별한 계기는 없다. 그때그때 의문이 들면 서로에게 의견을 물어보는 게 우리의 대화 방식이기 때문이다. 엄청난 후폭풍이 올줄 뻔히 알면서…. 데이트 중에 왜 그런 이야기를 하는지 의아해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우리는 음식, 영화, 여행 이런 것보다 사회 문제에 더 관심이 많은 편이다. 일상적 대화 방식으로 얘기하다 보니 전문성이나 사실관계의 엄밀성은 떨어지고 각자의 가치관 측면이 강조되는 것이 문제이기는 하다.
그녀: 참여연대가 유엔에 편지 보내면 안 돼?
나: 왜 정부 조사 결과를 믿지 않아? 미흡한 점도 있지만 그 정도면 북한 소행이라고 해도 큰 무리는 없지 않나.
그녀: 조사 결과를 전면 부정하는 것과 부족하고 의혹이 남은 부분을 지적하는 것은 다른 것 아냐? 정부가 안보리를 통한 제재를 추진하는 상황에서 ‘이런 점은 이상하니 고려해 달라’는 말은 할 수 있잖아.
나: 결국 같은 말이잖아. 참여연대가 그렇게 순수한 마음으로 서한을 보낸 것 같지는 않은데.
그녀: 이상한 건 사실이잖아? 발표 때 공개한 어뢰 구조도도 다른 어뢰 도면이었다면서? 그동안 계속 말 바꾼 것도 많고….
나: 미흡한 점은 있지. 하지만 완벽하게 입증하기 어려운 사안이잖아. 그럼 정부가 엉뚱한 어뢰 잔해를 빠뜨려 놓고 인양한 뒤에 북한 소행이라고 조작했다는 말이야? 지금이 5공 시절인가? 우리나라 진보는 왜 북한 얘기만 나오면 감싸는지 몰라. 북한이 진보적이라고 생각하나? (이쯤부터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그녀: 내가 언제 북한 소행이 아니라고 했어? 왜 이야기를 그쪽으로 몰아?
나: 지금 대통령이 노 전 대통령이어도 그렇게 말했을까?
그녀: 그렇게 말할 거야? 차 세워줘.
그 뒤로 일주일간 만나지 못했다. 반성의 시간. 생각해 보면 우리 둘 다 사실에 기초해 판단을 한 것이 아니라, 생각의 틀이 먼저 정해져 있고 그 안에 참여연대 사건을 대입한 게 아닌가 싶다. 서한 내용은 둘 다 보지도 않았으니까.
○ 진보엄마? 보수아빠?
천안함 사태든, 무상급식 문제든 대개는 한 번의 싸움으로 끝나지만 도저히 풀리지 않는 부분도 있다.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 시위(광우병 사태) 때 어린아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나와 시위를 한 엄마들 문제였다. 나는 기본적으로 정부가 협상 과정에서 미흡한 점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시위가 과도했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당연히 그렇게 위험한 미국산 쇠고기를 수입한 정부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쪽이며, 따라서 시위는 정당하다는 입장이다. 워낙 파장이 컸던 사안이라 어차피 절충점은 없는 일. 문제는 엉뚱한 데서 터졌다.
나: 백번 양보해서 아무리 시위가 정당하다고 해도 어린아이까지 데리고 나오는 것은 너무 심한 것 아니야? 물리적 충돌이 뻔히 예상되는데 그러다 아이가 다치면?
그녀: 얼마나 절박하면 그렇게까지 했겠어. 그 마음을 알아줘야 하는 것 아냐?
나: 엄마가 뭐야? 세상이 무너져도 내 자식은 살리려고 하는 게 부모 아니야? 자기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자식까지 그 위험한 상황에 끌고 나오는 사람들이 부모야? 어떻게 그렇게 비정할 수가 있어?
그녀: 내 아이가 위험한 쇠고기 먹을 수 있으니까 나온 것이지. 나라도 그렇게 하겠다.
나: 뭐? 그걸 말이라고 해? 민주화 투쟁에 나서는 게 옳은 일이지만 그래도 한편으로 내 아이가 안 다쳤으면 하는 게 부모 마음 아니야? 사상 때문에 가족 버리고, 부모 신고하는 것은 6·25때 공산당이나 하던 짓이잖아?
‘아∼, 그녀와 결혼하게 되면 본의 아니게 저출산 시류에 동참해야 할 것 같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 대립을 넘어 이해로
그렇다고 논쟁이 완전히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당장 개별 사안에서 접점을 찾기는 어려워도 시간이 지나면서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의 주장을 생각해 보는 계기는 됐기 때문이다. 그중에는 받아들일 수 있는 부분도 없지는 않았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소속 교사들의 명단 공개 문제는 내가 그녀의 생각에 어쩔 수 없이(?) 동의한 경우다. 한나라당 조전혁 의원이 법원이 금지한 전교조 교사 명단을 전격 공개한 것이 과연 정당하냐는 것이다.
나는 학부모로서 선생님의 성향에 대한 정보는 ‘알 권리’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좀 달리 생각했다.
“법에 공개 항목이 정해져 있고 전교조 명단이 항목에 없는 한 판사가 공개 금지 판결을 내린 것은 당연하지 않아? 만약 명단을 알고 싶다면 법을 개정한 뒤에 공개해야지. 그게 민주주의의 대전제 아니야? 일단의 사람들이, 그것도 여당 의원이 자신의 판단이 옳다고 생각하고 법을 넘어 행동을 하기 시작하면 어떻게 민주주의가 유지될 수 있어? 법을 지키라는 말은 광장에 나온 시위대나, 국회 본회의장을 점거한 야당에만 할 말은 아니잖아?”
나는 지금도 그 판결이 옳다고 보지 않는다. 하지만 ‘준법’ 문제에 대한 그녀의 지적은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법치를 존중하는 것은 보수의 근본가치이기도 하다. 조 의원이 일단 법원의 판결에 따르면서 상급심의 판단을 기다리는 것이 ‘뉴라이트’를 주창하는 정치인으로서 바람직한 모습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나아가 내가 이 사안과 관련해 준법의 가치를 인정하듯이 그녀도 시위대(그 시위대가 어느 편이든)에게, 또 정치인들에게 준법을 요구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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