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공존을 향해/3부]<1>개천에서 용 안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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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8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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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진 교육 사다리… ‘아버지 스펙’ 못 넘는 아이들

“나처럼 밑바닥에서 위로 올라오는 청년들이 나올 수 없다면 미래가 없다.”

이명박 대통령은 이번 8·15 경축사 연설문을 독회(讀會)하는 과정에서 이런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대통령은 연설에서 ‘공정(公正)사회’를 거듭 강조했다. 공정한 사회라고 하려면 능력과 노력에 따라 결과는 달라지지만 적어도 ‘균등한 기회’는 보장돼 있어야 한다. 나아가 패자에게도 기회가 주어지고, 넘어진 사람이 다시 일어서고, 승자가 독식하지 않고, 서민과 약자가 불이익당하지 않는 사회라야 한다.

이 대통령은 동지상고 재학 시절 생활비를 벌기 위해 여학교 앞에서 얼굴을 가린 채 뻥튀기 장사를 했을 만큼 지독하게 가난했다. 대통령 자신이 ‘개천의 용’인 셈이다. 그렇지만 이 통로가 점차 닫히고 있다. ‘개천에서 용 나는’ 일이 해가 갈수록 어려워지는 것이다.

○ ‘김태호 스펙’ 재현 가능할까

김태호 국무총리 내정자는 이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자수성가의 모델이다. 그는 경남 거창에서 ‘소 장수’의 아들로 태어나 ‘농사를 지어도 농약병에 적힌 영어는 알아야 한다’는 부친의 뜻에 따라 거창농고에 입학했다고 한다. 고교 졸업 후 동일계열 진학 방식으로 서울대 농업교육과에 입학했다.

취재팀은 ‘그와 비슷한 조건의 한 세대 밑 젊은이가 비슷한 경로를 걸을 확률은 얼마나 될까’를 따져봤다. 김 내정자가 졸업한 거창농고는 2008년 학교명을 ‘아림고’로 바꿨다. 학교정보공시 포털 ‘학교알리미’에 따르면 아림고의 2009학년도 졸업자 141명 가운데 4년제 대학에 진학한 학생은 27명. 2년제 대학에 진학한 학생은 93명, 취업자는 5명이다. 하지만 서울대를 포함해 서울 소재 대학에 입학한 학생은 없었다. 아림고에 따르면 1983년 이후 이 학교 출신 서울대 입학생은 한 명도 없었다.

김 내정자와 비슷한 가정환경 출신 학생들은 서울대에 얼마나 많이 진학할까. 가정환경을 정하는 것은 대체로 아버지의 직업과 교육수준이다. 김 내정자 아버지는 농민이었고 고졸이다.

서울대 대학생활문화원의 조사결과에 따르면 2010년 신입생 중 아버지가 농축수산업에 종사하는 비율은 전체의 0.7%에 불과했다. 1998년만 해도 전체 입학생 중 아버지가 농어민인 입학생은 전체의 4.7%였지만 12년 만에 6∼7분의 1 수준으로 줄어든 것. 같은 기간 농어가 인구는 472만 명에서 330만 명으로 30% 줄었다. 농촌지역의 급속한 고령화로 수험생 자체가 줄었다는 점을 감안해도 0.7%라는 수치는 무직자나 전업주부, 정년퇴직자 등 사실상 직업이 없는 사람을 제외하면 전 직업군 가운데 가장 낮은 것이다. 상위에는 사무직(28.9%)과 전문직(21.3%)이 있었다.

아버지의 교육수준을 기준으로 ‘계층상승’ 가능성을 타진해 봐도 마찬가지였다. 올해 서울대 신입생 중 아버지의 학력이 고졸인 학생은 전체의 16.7%로, 대졸(53.0%) 및 대학원졸(28.8%)보다 훨씬 적었다. 신입생 부모 학력을 처음 조사한 2004년에는 아버지가 고졸인 학생은 전체의 24.1%였지만 △2005년 22.5% △2007년 19.1% △2009년 16.0%로 매년 줄었다. 이처럼 ‘고졸 아버지’를 둔 학생의 서울대 진학률이 큰 폭으로 하락한 것은 최근 부쩍 높아진 대학진학률과는 큰 관련이 없다. 대학 진학률이 급등한 것은 1975년 이후 출생 세대이지만 이들 고졸 아버지는 대개 1950∼1960년생이다.

서울대가 많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몇 년 전부터 지역균형선발제 정원(2011년 입시기준 729명)을 대폭 늘린 것도 이 같은 교육현실을 개선하기 위한 것이었다.

○ 무너지는 계층이동 사다리

어느 사회에나 계층은 존재한다. 그렇지만 건강한 사회는 계층이동의 통로가 열려 있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계층이동 사다리는 교육이다.

한국교육개발원은 2009년 1956∼1965년 출생자 2038명을 대상(조사 당시 44∼53세)으로 아버지의 직업, 교육수준이 조사 대상자의 직업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했다. 조사 결과 가정배경보다는 본인의 교육수준이 직업을 결정하는 데 영향력이 컸다. 이들 세대만 하더라도 공부만 열심히 하면 계층이동이 가능했다는 의미다.

하지만 이들 자녀 세대에서는 상황이 달라졌다. 권영길 의원(민주노동당)은 지난해 서울시내 외국어고와 일반고 신입생의 아버지 직업을 조사했다. 외고는 전문직 부모 비율이 20.22%였지만 일반고는 4.28%였다. 경영·관리직 부모 비율 역시 외고는 24.55%, 일반고는 8.84%로 차이가 컸다. 새로운 학벌을 대변하는 외고의 경우 부모 소득이 상위에 속하는 신입생이 전체의 절반에 육박하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사교육 확대가 교육기회 불균형 확대의 큰 원인이라고 지적한다.

김희삼 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위원은 “세대 간 계층 이동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출발선 격차를 줄이기 위한 조기 개입이 필요하다. 대학생 멘터링 사업 등을 확대해 취약계층 청소년에게 동기를 부여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숭희 서울대 교육학과 교수는 “현재의 평준화 시스템은 상위 5∼10% 아이들을 위해 다수가 희생할 뿐 중간층이 어떤 교육을 받고 어떤 직업을 갖게 될지 고민하지 않는다. 중간층을 위한 커리큘럼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곽민영 기자 havefun@donga.com
정세진 기자 mint4a@donga.com

▼ 지역아동센터 ‘착한 사교육’ 실험 ▼
‘형편’에 눌린 자신감 찾아주며 사교육-공교육의 완충역할
정부지원금 으로는 역부족… “더 못해주는 게 아쉬워”


초등학교 6학년인 혁준(가명·13)이는 2년 전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서울 관악구 미성동의 ‘물댄동산 난곡지역아동센터’를 찾아왔다. 그때만 해도 혁준이는 상담교사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당시 혁준이 어머니는 “재능이 있다는 얘기를 많이 들어 영재원(동작교육청 산하 과학영재원) 시험을 치렀지만 떨어졌다”며 안타까워했다.

센터의 이경아 선생님은 아이가 불안해한다는 것을 눈치챘다. 5년 전 사업에 실패한 뒤 혁준이 아빠는 행방불명됐다. 역시 넉넉하지 못한 이모네 집 단칸방을 빌려 어머니, 누나와 함께 살면서 김 군은 말이 없어졌다. 이 선생님은 아이에게 독서지도를 시작했다. 인근 서울대 과학교육과 학생들이 자원봉사자로 나서 혁준이에게 과학을 가르치기도 했다. 혁준이는 안정을 되찾았고 지난해 8월엔 과학영재원에 재도전해 합격했다. 올 초에는 초등학교 학생회장 선거에도 출마하는 등 적극적인 아이로 변했다.

난곡지역아동센터를 포함해 4개의 아동센터를 운영하는 손빈 ‘이웃사랑실천회’ 이사장(62)은 “혁준이처럼 사(私)교육의 사각지대에 있는 빈곤층 자녀에게 지역아동센터는 오아시스 같다”고 말한다.

“지역아동센터를 운영하면서 공부뿐 아니라 축구실력이 뛰어난 아이, 놀랄 만한 음악적 소질을 가진 아이 등 숨겨진 원석(原石)을 발견했습니다. 하지만 경제적인 문제로 이런 아이들에게 적절한 교육을 시키지 못하는 게 아쉬워요.”

대우증권과 푸르덴셜증권 등을 거쳐 자산운용사를 설립해 운영하다 2005년 퇴직한 손 이사장이 운영하는 지역아동센터에는 한 가지 규칙이 있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타온 상장을 반드시 벽에 걸고 서로를 칭찬하도록 한다는 것. 손 이사장은 “학업성적 우수자뿐만 아니라 줄넘기 자격증, 노래 잘하기, 효행상 등 어느 분야에서든 아이들이 잘한 것은 칭찬해 주는 게 우리 센터의 원칙”이라며 “칭찬은 저소득층 가정 아이들의 자존감을 회복시키는 첫걸음”이라고 말했다.

이웃사랑실천회 소속의 경기 안산시 단원구 원곡동의 안산지역아동센터. 이곳은 인근 학부모들에게 ‘수학성적 오르는 곳’으로 유명하다. 방과 후 센터에 오면 손발을 씻은 뒤 반드시 하루 30분씩 수학공부를 해야 한다는 규칙 덕분이다. 다문화가정의 아이로 3학년 2학기 때 중국에서 한국 초등학교로 전학 온 이선미(가명·11) 양은 1년 만인 4학년 1학기 때 학교가 마치자마자 100점짜리 수학 시험지를 들고 센터 선생님에게 뛰어와 자랑했다.

정권 안산센터장은 “사교육과는 거리가 먼 다문화가정의 아이가 대다수인 이곳에서 매일 조금씩이라도 공부하는 습관을 심어주고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길러주는 데 목표를 두고 있다”고 말했다.

현재 전국에는 3500여 곳의 지역아동센터가 있다. 이 중 상당수는 개인이나 종교단체가 운영하고 있다. 정부 지원금만으로는 부족한데 추가로 필요한 후원금을 모금하는 게 쉽지 않아 센터 교육의 질이 만족스럽지 못하다.

손 이사장은 “내가 증권사에서 일한 경력 덕분에 주변의 영업마케팅 분야 전문가들에게서 도움을 많이 받고 있지만 다른 지역아동센터는 어려움이 많다”며 “전국의 지역아동센터가 사교육과 공교육의 완충역할을 하도록 정부가 지원하는 것도 교육격차 해소의 좋은 대안이 된다”고 말했다.

정세진 기자 mint4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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