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은한 샹들리에 조명 아래 화이트와 우드 컬러로 우아하게 꾸며진 유럽식 거실, 푸근한 인상의 남자와 그의 딸처럼 보이지만 실은 아내인 예쁜 여자가 손님을 맞는다. 재해로 집을 잃은 남자의 친구와 그의 여고생 딸이 함께 살려고 이사 온 것. 낑낑거리며 이삿짐을 옮기는 소녀를 보고 부인은 "우리 애 시키면 돼. 아들~! 나와서 힘 좀 써!"라고 부른다. 방에서 나온 건 예쁜 여자의 남동생쯤 돼 보이는 떠꺼머리 총각이다. (MBC '장난스런 키스')
딸보다 2살 많은 엄마, '또래'보다 8살 많은 동창, 남편보다 11살 많은 아내 등 최근 드라마에서는 배역과 연기자의 실제 나이가 맞지 않는 '나이 파괴' 캐스팅이 많다. ▶너무 일찍 엄마가 된 여배우들
MBC '장난스런 키스'의 주인공 김현중(24)과 그의 엄마로 나오는 여배우 정혜영(37)의 실제 나이 차이는 13세다. 특히 정혜영이 어려 보이는 외모여서 두 사람은 오누이처럼 보인다. 제작사는 "만화를 원작으로 하는 작품이고 러블리 맘 캐릭터에 정혜영이 어울려서 캐스팅했다"고 설명했지만 무리수를 둔 건 사실. 드라마 시작 전 열린 제작보고회에서는 '젊은' 정혜영에게 '다 큰' 김현중의 엄마가 된 소감을 묻는 질문이 쇄도했다.
SBS '자이언트'에서 술집 '로얄클럽'의 마담으로 나오는 김서형(34)은 만보건설 회장인 이덕화(58)의 전처이다. 극중 두 사람의 나이차는 크지 않은 것으로 설정돼 있지만 실제 배우의 나이 차이는 24세나 된다. 더구나 김서형은 두 살 어린 후배 박진희(32)의 생모로 나온다. 김서형은 친구 같은 박진희의 엄마를 맡으라는 캐스팅 제안을 처음엔 거절했다. 하지만 어머니로서의 모습보다는 사업가적 기질을 발휘하는 여장부적인 모습이 부각될 것이라는 제작진의 설득에 출연을 결심하게 됐다.
그런가 하면 서영희는 지난해 화제작 '선덕여왕'(MBC)에서 덕만공주(이요원)의 실질적인 엄마 노릇을 한 유모 소화로 분했다. 두 배우는 1980년생 동갑내기다.
▶원 톱은 검증된 배우, 나머지 주연급은 젊게
시청률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제작사들은 시청자들의 시선을 붙들어둘 수 있는 젊은 배우를 선호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 때문에 연기력이 검증된 중견 남자 배우를 원 톱으로 내세우고 주위에 젊은 여배우들을 포진시키는 전략을 구사하는 경우가 많으며, 이는 결과적으로 나이 파괴 캐스팅으로 이어지고 있다.
'자이언트'의 주인공 이범수(40)는 상대역 박진희와 극중에서는 동갑내기로 설정돼 있지만 실제로는 8살이 더 많다. 여동생 미주역의 황정음(25)은 실제론 이범수의 조카뻘 나이다. 이범수는 "영화 '오 브라더스'에서 조로증(早老症)에 걸린 어린이 역할도 했다"면서 연기력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MBC 주말드라마 '김수로'에서 타이틀롤을 맡은 지성(33)도 극중 첫 사랑인 아효 공주 강별(20)과 실제론 13살 차이가 난다. 지성이 결혼하는 허황옥 역의 서지혜(26)와는 7살 차이다. 세 사람은 극중 같은 또래로 설정돼 있다.
▶일부 배역 캐스팅이 늦어져 나이대가 안 맞기도
일부 배역의 캐스팅이 늦어지는 바람에 상대 배역들과 '난처한' 나이 차이가 나는 경우도 있다. SBS '나는 전설이다'와 KBS '제빵왕 김탁구'의 남자 주인공 이준혁(26)과 윤시윤(24)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준혁은 첫 방송이 나가기 한 달 전에 캐스팅됐다. 이 때문에 극중 애인 김정은(34)과의 나이 차이는 물론이고 전처인 장영남(37)보다 11살이 더 적다는 사실을 고민할 겨를이 없었다. 이준혁은 7살배기 아들을 둔 30대 이혼남으로 급하게 변신하느라 체중을 6kg이나 불리고 옷도 '노티'나는 것으로 골라 입어야 했다. 하지만 고생스런 촬영 탓에 살이 도로 빠져 상대 여배우보다 어려 보일까봐 애를 태우고 있다.
'제빵왕 김탁구'는 이정섭 PD가 "인큐베이터 속의 조산아"라고 할 정도로 남자 주인공 선정 과정에 우여곡절이 많았다. 엄태웅, 공유 같은 톱스타가 거론됐지만 번번이 무산됐다. 결국 유진(29)의 연인 김탁구 배역은 5세 어린 윤시윤에게 돌아갔다. 유진은 제작보고회에서 상대 배우와 나이 차이가 나 보일까봐 신경이 쓰였다는 말을 했었다. 더구나 윤시윤은 어려보이는 외모 때문에 전작인 MBC 시트콤 '지붕 뚫고 하이킥'에서 1986년생 동갑내기 최다니엘의 조카로 나왔었다. 두 사람의 극중 나이는 27세와 18세였다.
1999년 미스코리아 진 출신 김연주(30)는 미스코리아 7년 선배 이승연(42)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MBC 새 아침드라마 '주홍 글씨'에 늦게 합류했다. 그는 13살, 9살 더 많은 김영호(43), 조연우(39) 두 남자 사이를 오가며 이승연과 함께 4각 멜로 연기를 펼친다.
제작진은 연기력과 분장 기술로 나이 문제를 극복할 수 있다고 장담한다. 하지만 드라마의 시청자 게시판엔 나이 파괴 캐스팅에 적응하지 못하고 이를 비판하는 시청자들의 글이 많이 올라와 있다.
누리꾼 김승현 씨는 '자이언트' 게시판에 올린 글에서 "이범수와 박진희가 나오는 장면을 보면 나이 차이 때문에 한숨만 나온다. 김서형-박진희 모녀는 '주몽'의 오연수(39)-송일국(39) 모자 이후로 제일 어이없는 캐스팅"이라고 비판했다.
김양희 씨는 '나는 전설이다' 게시판에 "이준혁이 김정은, 장영남보다 어려 극에 몰입할 수가 없다"며 "록 밴드 리더 출신이라는 설정상 이준혁보다 신성우(42)가 더 나았을 것"이라는 의견을 남겼다.
'장난스런 키스'를 보는 김미진 씨는 "아무리 귀엽고 철없는 엄마라도 젊고 예쁜 정혜영 씨에게 아직 엄마 역은 어울리지 않는다"라며 "엄마 역은 10년 후에나 맡아 달라"고 당부했다.
최현정 기자 phoeb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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