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 전 18대 국회의원 총선거를 앞두고 민주당은 깐깐하기로 소문난 박재승 변호사를 공천심사위원장으로 영입했다. 열린우리당에서 돌고 돌아 민주당으로 간판을 바꿔단 뒤 처음 맞는 총선인지라 공천에서 국민에게 뭔가를 보여줄 이미지 쇄신이 필요했다. 당시 민주당은 531만 표 차로 한나라당에 정권을 내준 충격으로 몸을 가누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박재승은 민주당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그는 뇌물수수, 알선수재, 공금횡령, 파렴치범, 개인비리 등으로 금고 이상의 형이 확정된 인사를 공천에서 탈락시키는 ‘부정·비리 전력자 공천 배제’를 전격 발표했다. 박지원 전 대통령비서실장, 신계륜 사무총장 겸 총선기획단장, 김대중 전 대통령의 차남인 김홍업 의원, 노무현 정권의 창업 공신인 안희정 씨, 이상수 전 노동부 장관, 15·16대 국회의원을 지낸 김민석 전 최고위원 등 거물급 정치인이 대거 대상에 올랐다.
당 안팎에서 난리가 났다. 당사자들은 성명 발표와 기자회견을 열어 항변했고, 당 지도부는 정상 참작과 사안에 따른 선별을 압박했다. 그러나 박재승은 흔들리지 않았다. “희생자와 억울한 사람이 나온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큰일을 하자면 억울한 사람의 희생을 밟고 가는 것이 우리의 역사”라며 버텼다. 결국 박재승은 뜻을 관철시켰다. 가히 ‘박재승발(發) 쿠데타’ ‘공천혁명’으로 불릴 만했다. 다 죽어가던 민주당에 활기가 돌고, 공천은 흥행에 성공했다.
그러나 그때뿐이었다. 총선 이후 민주당은 거꾸로 내달렸다. 공천에서 배제됐던 인사들이 어떻게 됐는지 보라. 탈당한 박지원은 전남 목포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되자 거의 곧바로 복당했고, 원내대표를 거쳐 지금은 최고위원에 올랐다. 마찬가지로 탈당한 신계륜은 서울 성북을(乙)에, 이상수는 중랑갑(甲)에 무소속으로 출마했으나 낙선하자 얼마 뒤 나란히 복당했다. 안희정은 그 후 최고위원을 지냈고 2010년 6·2지방선거 때 민주당 공천으로 충남도지사 선거에 출마해 당선됐다. 김민석은 최고위원과 지방선거기획공동본부장을 지냈다. 박재승의 공천 배제가 아무 의미가 없게 돼버린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2년 뒤 민주당은 뇌물수수 혐의로 재판 중인 한명숙, 불법 정치자금 수수죄로 1심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이광재 씨를 각각 서울시장과 강원도지사 후보로 공천했다. 형이 확정되진 않았지만 엄연한 비리 연루자를 공직후보자로 내세운 것은 도덕성은 고려 요소가 아니었다는 징표일 수밖에 없다. 한명숙은 낙선했고, 이광재는 당선됐지만 대법원 확정 판결로 자리에서 물러났다.
19대 총선을 앞두고 있는 지금, 공천과 선거를 이끌어갈 민주당 대표와 사무총장이 모두 비리 연루자다. 한명숙 대표는 뇌물 수수(1·2심 무죄 판결)와 불법 정치자금 수수(1심 무죄 판결) 혐의를 받고 있다. 임종석 사무총장은 불법 정치자금 수수죄로 1심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비리 관련 여부를 공천의 중요한 잣대로 내세울 수 있겠는가. 민주당이 한나라당과는 달리 자신들의 전당대회 돈봉투 의혹에 대해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는 것만 봐도 그런 기대는 일찌감치 물 건너간 것 같다.
지난 4년 사이 민주당의 당명은 통합민주당에서 민주통합당으로 바뀌었다. 당명의 앞뒤가 뒤바뀐 사이에 비리를 바라보는 시각도 뒤바뀐 것인가. 그럴 리는 없겠지만, 박재승이 다시 공천심사위원장을 맡는다면 이번엔 울고 돌아갈 수밖에 없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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