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BR]과신은 비효율을 낳고 아집은 이성을 가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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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2월 2일 03시 00분


변화와 혁신을 대하는 두가지 오류

DBR그래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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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에서 가장 혁신적인 변화를 초래한 ‘마물(魔物)’은 화약이었다. 특히 총이 발명되면서 전쟁의 양상과 전술에 혁신적 변화가 일어났다. 하지만 17세기 러시아-스웨덴 연합군은 이런 신기술에 너무 성급하게 열광해 지나치게 개방적인 태도를 취한 탓에, 20세기 초 러시아는 너무 둔감하고 보수적인 태도를 고수하다 각각 큰 화를 입었다. 변화와 혁신을 대할 때 종종 벌어지는 이 두 가지 오류를 소개한 DBR(동아비즈니스리뷰) 기사의 주요 내용을 소개한다.

○ 화약 병기의 등장

16세기에 총이 처음 등장했을 때 화약병기에 대한 기대는 매우 컸다. 일반적으로 총과 대포가 기병을 퇴장시켰다고 알고 있지만 사실 총이 나오기 이전부터 기사의 영광은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과거 기사가 전쟁을 지배했던 건 기병이 보병보다 우월해서가 아니었다. 보병이 기병에 비해 상대적으로 무장이 열악했고 훈련이 덜된 병사들이 많았던 탓이었다. 고대부터 야무지게 조직된 보병들이 장창을 들고 창의 숲을 형성하면 기병들이 그것을 뚫기는 쉽지 않았다.

기병들은 총을 활용하면서 보병군단의 창의 숲에 육탄으로 부딪치지 않고 창날의 바깥에서 공격을 할 수 있게 됐다. 물론 보병들도 총으로 무장했지만 17세기까지 소총의 유효 사거리는 겨우 25m, 사격 속도는 1분에 2발 정도였다. 보병들이 아무리 교대로 순환발사를 해도 장전 시간이 길어서 소총의 사정거리 밖에서 대기하던 기병들은 공격할 만한 충분한 여유가 있었다. 게다가 기병들은 언제나 보병들보다 중무장을 할 수 있었다. 창의 사정거리는 길어야 4∼5m였기 때문에 보병이 창으로 방어막을 형성한다 해도 사실상 이들의 코앞까지 접근해 소총을 들이댈 수 있었다. 그것도 말 위에서 내려다보면서.

○ 창 대신 총으로 무장한 기병

이 황홀한 장면에 매료된 기병들은 16세기가 가기 전 서둘러 창을 버리고 총을 집어 들었다. 기병을 위한 짧고 간편한 소총이 개발됐고 이보다 더 간편한 피스톨도 나왔다. 피스톨은 기병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겨우 한 발밖에 쏠 수가 없었지만 작고 가벼운 탓에 두 자루 정도는 상비할 수 있었다. 기병은 보통의 유효 사거리인 25m 근처에서 한 발을 쏘고 더 근접해서 한 발을 더 쏜다. 공포에 사로잡힌 보병이 진을 깨고 도망치기 시작하면 기병은 말을 달려 도망치는 적병의 등 뒤에서 칼을 휘둘러 살육을 시작한다. 적이 제법 견고하게 버티면 기병들은 즉시 옆으로 말을 달려 보병의 사격권에서 벗어나고 후위의 기병이 다시 돌격한다. 빠져나간 기병은 본래 대형의 맨 뒤로 돌아가서 다시 총을 장전한다. 이런 식으로 기병들은 보병들이 무너질 때까지 계속 선회하며 보병들을 압박한다.

그러나 이 선회전술은 심각한 문제점이 있었다. 총신이 짧아진 피스톨은 명중률이 형편없었다. 게다가 기병은 절대 가만히 있지 못하는 말 위에서 발사한다. 또 선회대형은 복잡하고 낭비적이었다. 총을 사용하면서 백병전을 연습하지 않게 되자 기병들의 전투력은 뚝 떨어졌다. 기병과 보병이 서로 총으로 대결한다고 할 때 보다 효율적이고 명중률이 높은 집단이 승리하는 게 당연하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피스톨을 이용한 기병들의 선회전술은 요란하고 부산스럽기만 하지 실효성이 떨어지는 겁쟁이들의 전술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1610년 클루시노 전투가 이를 극적으로 보여준다.

○ 1610년 클루시노 전투

1610년 폴란드가 클루시노 지역에서 러시아-스웨덴 연합군과 맞붙었다. 당시 폴란드는 유럽에서 제일 낙후한 지역으로 피스톨이 부족해 거의 창과 기병도로 무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용기가 있었다. 러시아-스웨덴 연합군이 선회전술을 사용해서 폴란드군에게 일제 사격을 퍼붓고 선회하려고 할 때 폴란드 기병들은 검을 들고 달려들었다. 러시아와 스웨덴 기병들은 당황했으나 피스톨을 장전할 틈이 없었다. 행여나 발사를 해도 적을 제압할 확률은 10%도 되지 않았다. 화약무기를 지나치게 신뢰한 탓에 그들은 검술과 창술이 서툴렀다. 용감한 폴란드 기병들은 헛되이 저항하는 신식 기병들의 선회대형을 박살내 버렸다.

충격을 받은 연합군 기병들은 겁쟁이 전술을 버리고 다시 기병도를 들었다. 화약무기를 아주 포기한 건 아니지만 소리만 요란한 무기에 의존해서는 기병이 허풍쟁이 부대로 전락해 버릴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뜨거운 화약병기와 서늘한 칼날, 즉 냉병기를 함께 장착했다. 적진과 충돌할 때는 오직 냉병기에 의존하고 적진에 돌입한 후 난전이 벌어졌을 때 피스톨을 보조적으로 사용했다. 이 변화는 대성공을 거뒀다. 그제야 화약무기도 제 역할을 찾았으며 기병대가 의장대로 전락하는 것을 150년 이상 늦췄다.

○ 서늘한 칼날, 참담한 패배

제1차 세계대전 직전 러시아의 군사개혁과 전쟁 준비를 책임진 사람은 블라디미르 수코믈리노프 장군이었다. 19세기가 거의 끝나갈 무렵 터키전쟁에 젊은 기병장교로 참전했던 그는 기병도를 들고 과감한 돌격을 감행해 획기적인 승리를 거뒀다. 하지만 그의 승리는 기병의 검과 창이 위력을 발휘하는 게 가능했던 시기가 거의 끝나갈 무렵 전술적으로 가장 낙후한 지역에서 벌어진 기적 같은 일이었다. 문제는 수코믈리노프가 이 단 한 번의 전투 경험을 영원한 진리로 믿었다는 점이다. 그는 차가운 칼날과 용기를 대체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거부했다.

20세기에 들어서자 그는 화기전술을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하는 혁신적인 교관을 모조리 참모대학에서 파면했다. 심지어 러일전쟁에서 일본군에게 무참하게 당한 뒤에도 러시아군의 개혁을 거부하고 현대전과 현대 군사과학에 대한 연구마저 중지시켰다. 포탄과 소총, 총알 생산 공장 증설까지 거부한 그의 결정 탓에 러시아군은 선진무기와 선진전술은 고사하고 서방 군대의 3분의 1에도 못 미치는 포탄을 가지고 제1차 세계대전을 치러야 했다. 그 결과 러시아군은 참혹한 패배를 거듭했고 국가와 지휘관에 대한 병사들의 분노가 러시아 혁명과 제정 러시아의 종말을 초래했다.

○ 변화와 신기술을 대할 때 벌어지는 두 가지 오류

화기를 둘러싼 17세기 클루시노 전투와 20세기 초 수코믈리노프의 군사정책 사이에는 두 가지 공통점이 있다. 우선 두 사례 모두 기술의 실상과 변화의 내용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다. 17세기 기병들은 화약 무기를 과대평가했고 20세기 러시아는 과소평가했다. 감정과 욕망이 객관적 판단을 저해했다는 점 역시 닮아 있다. 클루시노 전투 당시 러시아-스웨덴 연합군은 백병전을 피할 수 있다는 유혹에 빠져 서늘한 칼날 대신 겉보기에 화려한 피스톨을 선택했다. 수코믈리노프로 대변되는 20세기 러시아는 구세대의 특권을 유지하려는 고루한 욕망이 이성을 가렸다.

현대사회에는 신기술이 넘쳐 난다. 보수적 태도는 거의 사라졌다. 많은 사람들이 정보와 변화에 목말라하는 게 그 증거다. 그러나 욕망을 조절하지 못하면 두 가지 잘못을 똑같이 반복할 수 있다. 지도자일수록 자신의 판단과 고집, 선입견이 개인적 욕망과 유혹에 사로잡힌 게 아닌지 늘 검증하고 조심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임용한 한국역사고전연구소장  
정리=이방실 기자 smile@donga.com  

비즈니스 리더를 위한 고품격 경영저널 DBR(동아비즈니스리뷰) 98호(2월 1일자)의 주요 기사를 소개합니다.

DBR 웹사이트 www.dongabiz.com, 구독 문의 02-2020-0570

기업 승계계획 성공 가이드

▼ Special Report


기업이 지속가능한 성장을 하려면 승계 계획(succession plan)을 조직 내에 체계화해야 하는 건 필수불가결한 일이다. 승계 계획은 모든 리더십 레벨에서 고성과를 내는 인력을 지속적으로 공급해 조직을 영속적으로 만드는 활동이다. 이를 위해 체계적인 인력 육성 계획과 향후 요구되는 포지션별 역량 지도 작성, 시장 상황 변화에 따른 인재 수요 예측, 리더십 모델 정립 등의 작업이 필수적이다. DBR가 성공적인 승계 계획을 세우기 위한 전략과 구체적 가이드라인을 제시했다. 인재 육성과 후계자 선정의 모범사례로 꼽히는 GE의 승계 전략도 집중 조명한다.



대중은 왜 강자에게 휘둘리는가

▼ Revisiting Machiavelli


마키아벨리 시대의 대중은 메디치 가문이 르네상스를 일으키고 피렌체 경제를 유럽 최고 수준으로 격상시켰을 때 앞다투어 찬양했다. 그러다 경제가 어려워지고 프랑스의 침략이 이어지자 수도사 사보나롤라의 신정정치의 주술에 빠져들게 된다. 그러나 종교적 열광주의도 잠시뿐이었다. 피렌체 대중은 4년 만에 사보나롤라를 불태워 죽여 버렸다. 마키아벨리는 대중이 왜 늘 강자의 논리에 휘둘리고 힘을 가진 포식자에게 잡아먹히는 나약한 존재인지, 또 다른 사람의 지시를 받고 사는 것에 익숙해져서 스스로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지 못하는지 고민하게 된다. 마키아벨리의 대중의 한계에 대한 인문학적 성찰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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