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리뷰]황색 저널리즘에 질식돼가는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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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3년 3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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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극 ‘독살미녀 윤정빈’ ★★★☆

1924년 발생한 실화를 모티브로 대중에 의해 진실이 질식되는 현상을 풍자한 연극 ‘독살미녀 윤정빈’. 남산예술센터 제공
1924년 발생한 실화를 모티브로 대중에 의해 진실이 질식되는 현상을 풍자한 연극 ‘독살미녀 윤정빈’. 남산예술센터 제공
“저는, 애매합니다.”

시절은 3·1운동이 끝나고 몇 년 뒤 경성(서울). 쥐약을 먹여 남편을 살해했다는 죄목을 쓴 촌부(村婦) 윤정빈(김지영)은 법정에서 이렇게 읍소한다.

애매하다? 유죄인지 무죄인지가 불분명하다는 말인가? 촌부가, 그것도 살인죄로 몰린 이가 자신이 유죄일 수도, 무죄일 수도 있다고 말하는 것이 가당키나 할까?

여기서 애매하다는 ‘불분명하다’는 의미의 애매(曖昧)하다가 아니라 ‘억울하다’는 뜻의 순우리말 형용사다. 그렇지만 극단 C바이러스의 창작극 ‘독살미녀 윤정빈’(이문원 작, 이현정 연출)은 억울한 윤정빈이 아니라 애매(曖昧)한 윤정빈을 파고든다.

소설가 지망생인 일요신보의 황기성 기자는 황색 저널리즘에 찌든 편집국장(이종윤)의 회유에 소설 같은 기사를 쓴다. 만나보지도 않은 윤정빈을 순결한 미모의 여인으로 묘사하면서 ‘경성에 등장한 희대의 독살미인’이라는 장문의 기사를 쓴 것.

이 기사는 일파만파를 낳는다. 흔하디흔한 치정사건이 웬만한 시국사건을 능가하는 대중의 관심사로 떠오른 것. 기자정신을 판 대가로 대중스타가 된 황 기자는 이를 만회하려 동분서주한다. 하지만 언론의 상업주의와 이를 항일운동의 촉매로 활용하는 민족주의 그리고 일본 제국주의까지 개입하면서 진실은 사라진다. 그리고 윤정빈과 황 기자는 대중의 환상을 충족시켜준 뒤 폐지처럼 버려진다.

연극이 소재로 삼은 1924년 ‘독살미인 김정필’ 사건의 전개 과정은 뮤지컬 ‘시카고’에 등장하는 치정살인들과 닮았다. ‘시카고’ 속 인물이 타짜라면 ‘독살미녀…’ 속 인물은 초짜란 차이가 있을 뿐. 그런 초짜의 매력을 살리기 위해선 황 기자의 절박함이 살아나야 하는데 너무 쉽게 희화화됐다. 유명 소설가로 살인사건을 취재하다가 냉혹한 진실 앞에 침묵할 수밖에 없었던 트루먼 커포티의 실화를 담은 영화 ‘카포티’의 전율이 못내 아쉽다. 또한 황 기자가 친일파라 매도하는 춘원 이광수는 1937년까지는 친일파가 아니었다.

: : i : :

31일까지 서울 예장동 남산예술센터 드라마센터. 1만5000∼2만5000원. 02-758-2150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독살미녀 윤정빈#창작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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