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무지 답이 보이지 않는 인생을 살고 있는가. 그렇다면 자신과 같은 처지에서 맨주먹으로 작은 부를 일궈낸 인생역전 이야기에 귀 기울여보자. 채널A 휴먼 다큐멘터리 〈서민갑부〉에 출연, 보통 사람들의 가슴에 희망의 불을 지핀 이 시대의 진정한 부자들을 만났다.
17세 철부지 아빠, 수제 버거로 인생역전 송두학 송쓰버거 사장
경기도 평택시의 평택국제중앙시장에서 ‘송쓰버거’라는 수제 버거 가게를 운영하는 송두학(35) 씨는 이 일대에서 신화적 존재로 꼽힌다. 30대 중반의 젊은 나이지만 장사 경력은 15년이나 된 베테랑이자 상가 건물 5채의 주인이어서다. 그는 평일에는 하루 2백 개, 주말엔 하루 5백 개가 넘는 버거를 팔아 연간 2억원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 어디 그뿐인가. 다른 상가 주인들에게 특유의 성실성과 리더십을 인정받아 지난해부터 평택국제중앙시장의 번영을 이끄는 상인회장으로 뛰고 있다.
“저, 정말 열심히 살았어요. 노력하면 안 되는 일이 없더라고요. 뭐든 마음먹기에 달렸어요. 긍정적인 자세가 중요해요. ‘난 왜 안 되지’ 하면 끝까지 되는 일이 없어요.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믿어야만 남들에게도 사랑받고 믿음을 줄 수 있어요. 요즘 다들 힘들다고만 하는데, 잘될 거라 믿고 열심히 살다 보면 어느 순간 세상이 환하게 열려요. 저도 그랬으니까요.”
노상과 행상 전전하면서도 각종 자격증 따 소년 송두학은 어른들의 눈에는 철부지 날라리였다. 친구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았지만 공부보다 놀기를 좋아하고 오토바이 타기를 즐기는 학생이었다. 그러다 자신의 눈에 든 여학생을 여자친구로 만든 그는 17세이던 고등학교 2학년 때 아이 아빠가 되면서 삶을 대하는 태도가 바뀌었다.
“여자친구가 임신 7개월에 이르자 더는 숨길 수가 없었어요. 이 친구와 결혼해야겠다는 생각이 확고했기 때문에 양가 어른들에게 사실대로 말씀드리고 끝까지 책임지고 싶다고 했더니, 저희 부모님이 여자친구를 데리고 아버지의 고향인 충남 논산으로 내려가 순산할 수 있게 도와주셨어요. 그 바람에 여자친구는 학업을 다 마치지 못했죠. 저만 평택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했는데, 친척들이 저희를 두고 뒤에서 욕을 하더라고요. 그때 여자친구의 손을 꼭 붙잡고 다짐했죠. ‘보란 듯이 잘 살아서 아무도 우리를 함부로 말하지 못하게 하자’고요. 그 여자친구가 바로 지금의 아내예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그는 서울 청계천 시장의 볼트 판매원으로 생활 전선에 나섰다. 그의 아내도 평택에서 옷 가게 점원과 식당 허드렛일을 하며 돈을 벌었다. 그 덕분에 두 사람은 1년 만에 1천5백만원을 모았지만 정치에 뜻을 둔 아버지를 돕다 보니 모든 돈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그럼에도 이들 부부는 부모를 원망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장사할 밑천을 마련하기 위해 노상과 행상을 전전했다. 송씨는 그 와중에도 먹고살기 위한 자구책으로 온갖 중장비 면허증은 물론 요양사 자격증까지 땄다. 지금까지 그가 취득한 면허와 자격증은 30개가 넘는다. 그는 사이버대학에서 사회복지학을 전공했는데, 앞으로 대학원에 진학해 공부를 더하는 게 꿈이다.
“배운 것도 없고, 할 줄 아는 것도 없어 냉엄한 현실의 벽에 부딪히다 보니 닥치는 대로 무엇이든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학창 시절부터 공부하는 요령이 없어 운전면허 필기시험도 5번이나 떨어진 끝에 합격했을 정도지만, 온갖 면허증과 자격증을 따면서 노력하면 뭐든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죠. 지금의 송쓰버거를 있게 한 장사 밑천도 중장비 면허를 따기 위해 공부하면서 알게 된 형 덕분에 마련할 수 있었어요. 그 형이 보증금조차 받지 않고, 돈을 벌어서 달라며 항공 점퍼를 대줬거든요.”
이후 송씨는 아내와 함께 항공 점퍼와 솜바지를 직접 착용하고 길거리 판매에 나섰다. 저녁에는 혼자서 노름방과 나이트클럽까지 찾아다니며 보따리 장사를 했다. 1 대 1로 파는 데만 급급하지 않고 10명분 이상을 구입하면 옷값을 깎아주는 나름의 마케팅 전술도 도입했다. 그 이문으로 종잣돈을 마련해 지금의 송쓰버거 자리에 문과 지붕이 있는 가게를 처음 열었다. 이곳에서 가방을 팔다 맞은편에 점포를 하나 더 마련해 옷 가게, 카페로 업종 변경을 하던 그는 5년 전 ‘송쓰버거’라는 간판을 내걸었다.
“처음에는 햄버거 완제품을 떼다 팔았는데 하루 2~3개밖에 나가지 않았어요. 기존 제품과는 차별화된 레시피 개발이 절실했어요. 수차례의 시행착오 끝에 연탄불에 구워 향미를 살린 국산 패티와 한국인의 입맛에 맞는 매콤한 소스를 개발하는 데 성공했고, 그걸로 수제 버거를 직접 만들어 팔기 시작했죠.”
돈의 노예가 되고 싶지 않아 체인점 제안 거절 1년 반 동안 다양한 시도 끝에 얻어낸 특별한 맛의 수제 버거는 금세 맛있다는 입소문이 났다. 일손이 달릴 만큼 불티나게 팔려 가게가 늘 문전성시를 이루자 그의 아내는 옷 가게를 그만두고 버거 장사를 거들었다. 17세인 큰딸과 14세인 둘째 딸도 학교에 가지 않는 주말에는 가게에 나와 서빙을 한다. 워낙 어릴 때 아빠가 되다보니 두 딸과 함께 자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송씨는 “나처럼 부모 속을 끓이지 않고 학교에 잘 다니는 두 딸을 보면 기특하고 고맙다”며 흐뭇해했다.
수제 버거 사업으로 송씨는 상가 건물 5채를 매입하고 그곳의 주인이 됐다. 40세가 되기 전까지 5채를 더 사들여 상가 건물 10채를 갖는 것이 목표다.
“버거 팔아 돈 벌고, 상가 건물에서 월세도 꾸준히 들어오니 사는 게 신이 나요. 하지만 돈의 노예가 되고 싶진 않아요. 돈을 많이 버는 게 목적이라면 대형 마트의 달콤한 입점 유혹도, 매일 수차례 걸려오는 체인점 문의도 다 받아줬겠지만 그동안 모두 정중히 사양했어요. 다른 사람이 체인점을 냈는데 가게가 잘되지 않으면 죄스러운 마음을 견딜 수 없을 것 같아서요.”
그에게 성공 비결을 묻자 “아직 성공했다고 생각지 않고, 비결이라 할 만한 것도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가족들을 생각하면서 열심히 살았을 뿐이에요. 제가 게으름 피우면 가족들이 힘들어지고, 제가 좀 힘들면 가족들이 그만큼 편해지니까요. 최근 아내가 이런 저를 처음으로 인정해줬어요. ‘당신이 노력하는 거 다 안다’고요. 학창 시절에도 한번 들어보지 못한 칭찬을 누구보다 믿고 사랑하는 아내에게 듣고, 가족들도 건강하게 잘 지내니 더없이 기쁘고 행복해요.”
그는 처자식에게만 잘하는 게 아니다. 처음 모은 목돈으로 부모에게 농사지을 땅을 사드리고, 이후 자동차를 두 차례 선물하는 등 효자로 소문이 자자하다.
“부모님께 차를 사드리고 나니 마음이 후련했어요. 제 옷은 안 사지만 부모님께 돈 쓰는 건 하나도 아깝지 않아요. 부모님이 힘들게 사시는 건 두고 볼 수가 없어요. 아내도 제가 부모에게 돈 쓰는 걸 반대하기는커녕 적극 권해요. 아내는 정말 특별한 사람이에요. 아내가 아니었으면 저는 지금 감옥에 가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평택국제중앙시장의 상인들은 최연소 상인회장인 그에게 남다른 기대를 걸고 있다. 그도 이런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나이트 마켓’이라는 행사를 열어 자신처럼 뭔가 해보려고 노력하고 열심히 사는 청년들에게 성공의 기회를 나눠주고 있다. 나이트 마켓은 특별한 장사 아이템을 가진 청년들에게 리어카를 빌려주고 노점 판매를 하게 게 살아남는 사람에게만 상가를 싸게 제공하는 일종의 창업 인큐베이팅 프로젝트다.
“시장이 잘되려면 대형 마트에 없는 아이템을 취급하는 핵심 점포가 많아져야 해요. 장사를 잘하려면 뭔가가 달라야 하는데, 남들과 똑같은 방식과 아이템으로 덤비면 아무리 투자를 많이 해도 망하기 십상이죠. 하지만 시장에서 오랫동안 장사하신 어르신들은 새로운 아이템을 가지고 도전할 엄두를 내기가 힘들어요. 그래서 청년들을 대상으로 나이트 마켓을 열어 창업 기회를 계속 주는 거예요. 이를 통해 시장이 정부나 지자체의 도움 없이도 자생할 수 있는 발판을 만드는 것이 저의 또 다른 목표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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