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9일 신동빈 롯데 회장에 대한 구속영장이 기각된 이후 검찰은 신 회장에 대한 추가 혐의를 조사하고 있다. 검찰 관계자는 10월 10일 신 회장의 혐의에 대해 더 확인할 것이 있어 보완 수사를 진행 중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수사 동력은 이미 상실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고, 신 회장 등을 곧 불구속 기소할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이다. 대대적인 수사 결과치고는 검찰이 도대체 밝혀낸 게 무엇이냐는 비판이 나온다.
그러나 검찰 수사 과정에서 드러난 혐의 가운데 롯데의 후진적 지배구조의 민낯을 보여주는 대목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는 지적이 있다. 총수 일가 관련 기업에 대한 일감 몰아주기와 경영에 참여하지 않은 총수 일가에 대한 고액 연봉 지급 등의 문제가 그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롯데는 지난해 신동주·동빈 형제 간 경영권 분쟁으로 비난을 받은 바 있다.
일감 몰아주기와 총수 일가 고액 연봉 지급은 우리 재벌의 후진적인 지배구조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여서 정부는 이 부분에 대한 규제를 계속 강화해 왔다. 그럼에도 롯데는 최근까지 구태를 벗어나지 못했던 것. 한 재계 관계자는 “롯데의 경영 투명성이 다른 재벌 그룹보다 뒤진다는 의미”라고 평가했다.
롯데 관계자는 “이번에 검찰에서 문제 삼은 것은 과거 신격호 총괄회장이 경영 전권을 행사할 때의 일로, 신동빈 회장과는 무관하다”면서 “검찰이 신 회장에게 책임을 묻는 것은 억울한 면이 있다”고 설명한다. 한마디로 창업주인 신격호 회장 시절의 구습이고, 신동빈 회장은 오히려 이를 없애려고 노력했다는 것이다.
신동빈 회장의 혐의는 크게 두 가지. 최근 10년간 친형인 신동주 SDJ코퍼레이션 회장, 신격호 총괄회장과 사실혼 관계인 서미경 씨와 그의 딸 유미 씨 등에게 총 500억 원대의 부당 급여를 지급했다(횡령)는 게 첫 번째 혐의다. 두 번째는 총수 일가가 세운 개인 회사에 일감을 몰아주거나 계열사 주식 거래를 지시해 1250억 원 가량의 손실을 끼쳤다(배임)는 것이다.
한국 경제의 고속 성장을 이끌어온 주역인 재벌 시스템은 여러 장점이 있음에도 치명적 문제점이 많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게 바로 법인격이 있는 기업을 개인 재산으로 생각하는 오너 경영인의 비뚤어진 의식이다. 검찰 수사 과정에 드러난 롯데의 비리는 바로 이런 재벌 구조의 문제점을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우리 재벌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총수 일가가 계열사 사이의 순환 출자 등을 이용해 낮은 지분으로 수십 개의 계열사를 지배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지분율이 낮기 때문에 배당이 적을 수밖에 없다. 바로 이를 탈법적으로 보상받는 방법이 총수 가족이 설립한 회사에 총수 지분율이 낮은 계열사의 일감을 몰아줘 이 계열사 자산을 빼돌리는 것이다.
또 경영 활동에 참여하지 않은 총수 일가를 임원으로 등록해놓고 높은 연봉을 주는 것도 회사 자산 빼돌리기의 직접적인 수법이다. 톡수통으로 알려진 검찰의 한 고위 관계자는 “등기이사로 등재했는지와 상관없이 실제 경영 활동에 참여하지 않는 총수 일가에게 고액의 연봉을 주는 것은 횡령으로 처벌받아 왔는데 재계 서열 5위의 그룹에서 최근까지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다”고 밝혔다.
물론 두 혐의 모두에 대해 신동빈 회장의 책임이 있는지는 앞으로 치열한 법리 공방이 벌어질 것으로 보인다. 우선 500억 원의 고액 연봉 지급 건에 대해 롯데 측은 수혜자가 신 회장 자신이 아닐뿐더러 2015년까지는 신격호 총괄회장이 경영을 실질적으로 챙겼기 때문에 신동빈 회장에게 책임을 묻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금융감독원 전자공시를 살펴보면 롯데 측의 해명에 의문이 남는다. 이에 따르면 신동주 SDJ 회장은 작년 한 해에만 호텔롯데와 롯데건설로부터 각각 5억2700만 원, 14억880만 원(퇴직금 13억6300만 원 포함)의 보수를 받았다. 경영권 분쟁이 벌어진 해에 신동주 회장에게 고액 연봉을 지급한 것을 신동빈 회장이 몰랐을 리 없다는 지적도 나온다.
신격호 총괄회장의 장녀 신영자 롯데장학재단 이사장이 호텔롯데에서 받은 연봉 수준도 이해하기 어렵다. 신 이사장의 2014, 2015년 연봉은 각각 30억6700만 원, 22억6800만 원이었다. 아버지 신격호 총괄회장이 같은 기간 8억7500만 원, 10억 원의 연봉을 받은 것에 비해서도 상당히 높다.
물론 신 이사장이 담당하는 면세사업부의 당시 경영 실적이 좋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명목으로 같은 기간에 받은 상여금 11억6700만 원, 5억6700만 원을 제외하고도 등기이사 중에서 가장 많다. 한 중견 변호사는 “주총에서 승인받은 이사 보수를 각 이사에게 배분할 때도 최소한의 합리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점에서 보면 이해하기 힘든 면이 있다”고 말했다. 신 이사장은 롯데백화점 및 면세점 입점과 관련해 업체 관계자들로부터 부정한 청탁을 받고 35억5000여만 원을 받아 챙긴 혐의 등으로 구속기소됐다.
서미경 씨 모녀에 대해 고액 연봉을 지급한 것에 대해 롯데 안팎에서는 평소 신격호 총괄회장이 막내 딸 유미 씨를 끔찍이 아낀 것과 관련지어 해석하는 사람이 많다. 또 은둔 생활을 하다시피하는 서씨 모녀에 대한 인간적 미안함도 작용했을 것으로 본다. 그러나 롯데 측은 공식적으로 “자세한 배경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고 밝혔다.
검찰이 신동빈 회장에게 적용한 배임 액수 1250억 원 가운데 가족 특혜와 관련된 금액은 480억 원이다. 검찰은 롯데 계열 영화관 롯데시네마 내 팝콘 등을 파는 매점 영업권을 2005~2013년 신영자 이사장, 서미경 씨에게 몰아줘 롯데시네마가 속한 롯데쇼핑에 480억 원의 손해를 끼쳤다고 본다.
신 이사장이 최대 주주인 시네마통상과 시네마푸드, 서미경 씨 소유인 유원실업, 유기개발 등은 롯데시네마 매점 사업권을 거의 독점하거나 롯데백화점 내에 점포를 운영하며 이익을 냈다. 경제개혁연대 등 시민단체는 유기개발 등이 롯데그룹의 위장 계열사이며 롯데백화점이 유기개발에 알짜배기 매장을 내준 것 등은 대표적인 일감 몰아주기라고 비판해 왔다.
롯데 측은 이 역시 “신격호 총괄회장이 자녀와 사실혼 관계 부인에게 운영을 맡기라고 지시한 결과”라고 해명했다. 신동빈 회장은 오히려 2011년부터 일감 몰아주기는 안 된다고 주장해 왔고, 2013년 공정거래위원회로부터 제재를 받은 이후에는 적극적으로 가족이 운영하는 매장을 철수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롯데 안팎에서는 이 부분을 신 회장의 배임 액수에 포함시킨 것은 검찰의 오버라는 반응이 나온다. 재계 사정에 밝은 한 변호사는 “신동빈 회장은 젊은 시절 노무라증권에서 근무한 탓인지 평소 글로벌 스탠더드와 준법경영을 강조한다”면서 “법원이 신 회장의 구속영장을 기각한 것도 롯데 측의 이런 해명을 받아들였기 때문 아니겠느냐”고 평가했다.
롯데 측 주장대로 1750억 원대의 횡령․배임 혐의에 대해 신동빈 회장이 법적인 책임은 없다고 해도 도덕적 책임까지 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재계 관계자는 “신동빈 회장이 그룹 회장이자 등기이사로서 이런 혐의에 대해 사전에 몰랐다고 하는 것은 궁색해 보인다”면서 “아버지 신격호 총괄회장의 그늘에서 과감하게 벗어나려는 노력을 구체적으로 보이는 것만이 이런 시선을 불식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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