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7년 10월 20일 새벽, 우리 의병 300명이 일본군 1개 분대가 수비하던 강원 고성읍을 습격했다. 월등한 화력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은 의병의 포위공격으로 세 시간 동안 꼼짝없이 웅크려 있었다.
의병이 철수하자 독이 오른 일본군은 의병과 이를 후원한 주민들을 분풀이 대상으로 삼고 만행을 저질렀다. 인근 마을 촌장 12명을 모아 총살했다. 1896년 전기 의병 이래 고성지방 항일전을 선도하던 권형원(權亨源)도 그중에 포함되어 있었다.
일본군은 시신이 된 의병장의 목을 잘랐다. 두 번째 수난이었다. 일본군은 인간으로서 할 수 없는 만행까지 저질렀다. 시신에서 잘라낸 머리를 본대가 있는 장전항으로 가져가 가마솥에 넣고 삶은 것이다.
권형원의 두골은 뒷날 우연히 일본에서 발견되었다. 집안의 동생 권증원이 1930년 전후 이와테(巖手) 의학전문학교(현 이와테의대) 재학 시절, 수학여행 때 들른 어느 신사(神社)에서 ‘강원도(江原道) 권형원(權亨源)’이라는 표지를 붙여놓은 두골을 직접 보았던 것이다.
이와 함께 1995년 홋카이도대 문학부 후루카와(古河) 강당 인류학교실에서 종이상자 속에 방치되어 있던 두골 6구가 발견됐다. 그중 한 구가 1906년 전남 진도에서 강제 반출된 동학군 두골로 밝혀졌다. 이 사건을 폭로한 원광대 박맹수 교수는 일본 7개 국립대학 박물관에 한국인 두골이 1000구 이상 ‘표본’으로 정리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권형원 의병장의 손자는 조부의 한을 조금이라도 풀고자 1962년 국가재건최고회의 시절, 독립유공자 포상을 개시할 때 생존 노인들의 구전 증언을 모아 포상 신청을 했다. 그리고 임종 시에는 조부의 두골을 찾아 고국으로 모셔올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고 한다.
권형원 의병장이 순국한 지 109년이 되었다. 참혹한 수난 이후 여전히 구천을 떠돌고 있을 구국의 원혼을 생각하면 가슴이 저며 온다. 일본 각지에 이제껏 방치되어 온 1000구 이상의 한국인 두골, 그 혼령을 어떻게 위안해줄 것인가. 지금이라도 정부 차원에서 체계적인 조사와 그에 따른 봉환 등 후속 조치가 이루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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