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트렌드/장선희]덕후의 시대, 잔혹한 취미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12월 1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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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을 분석해 내게 맞는 취미를 찾아준다는 업체의 홈페이지 화면. 인터넷 화면 캡처
성격을 분석해 내게 맞는 취미를 찾아준다는 업체의 홈페이지 화면. 인터넷 화면 캡처
장선희 문화부 기자
장선희 문화부 기자
 최근 ‘당신의 취미를 찾아 드립니다’란 모토를 내세운 업체가 등장했다. 궁금한 마음에 이 업체의 홈페이지에 들어가 봤다. 심리검사 같은 33개의 질문에 차례대로 답하니 성격을 창작형, 오락형 등으로 자세히 분석해줬다. 여기에 돈을 내면 드론, 플라모델 만들기처럼 한 분야의 전문가인 ‘하비(hobby) 큐레이터’가 맞춤형 미션을 담은 취미 박스를 매달 보내 준다고 했다. ‘취미가 없다’고 하소연하는 사람이 늘면서 새로 생겨난 이색 서비스인 셈이다.

  ‘덕후’의 시대다. 한 가지 분야에 몰두하는 사람을 뜻하는 일본어 ‘오타쿠’에서 유래한 ‘덕후’는 한때 유별나고 특이한 사람들을 지칭했지만 지금은 분위기가 달라졌다. TV에서도 일본 만화 캐릭터나 온갖 전자제품 모으기 같은 별별 취미생활에 열 올리는 연예인들이 심심찮게 등장하고 ‘덕밍아웃(덕후+커밍아웃)’이란 신조어가 이젠 구문이 됐을 정도다. 이런 세상에 취미 찾아 주는 서비스라니….

 “30대 중반에 취미 하나 없는 저, 비정상인가요?” “뭔가 즐기고는 싶은데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조언 좀 해주세요.”

 직장인과 취업준비생들이 모인 한 인터넷 카페에선 ‘취미 없음’을 토로하는 게시글이 종종 올라온다. ‘진짜 취미가 없는데 이력서엔 뭘 써야 하나’ ‘취미생활은 하고 싶은데 너무 피곤하다’는 식이다. 이런 글엔 ‘나도 낮잠 자는 것밖엔 취미가 없다’ ‘그나마 맥주 마시며 TV 보기가 유일한 취미’ 등 공감 댓글이 적잖게 달린다. 한 20대 남성은 “취미가 꼭 거창해야 하는 건 아니지만 어려서부터 뭔가 즐기며 살 줄 몰랐던 것 같아 오히려 덕후들이 부럽다”고 털어놨다. 덕후의 세상이건만 한쪽에선 취미가 없어 슬픈 이들이 아우성친다.

 꼭 젊은 사람들만 그런 건 아니다. 며칠 전 30년간 직장생활 끝에 은퇴를 앞둔 50대 지인에게 따끈한 신간을 한 권 선물했다. 일본 의학박사 사이토 시게타가 쓴 ‘좋아하는 일을 찾는다’란 책이다. ‘수십 년 정신없이 달려온 당신, 뒤늦게나마 취미를 찾고 즐겁게 살라’는 게 책의 주제다. 그런데 그는 책 선물을 받자마자 “은퇴한다니까 주변에서 제일 많이 하는 조언이 취미 찾으란 건데 이게 하루아침에 찾아지질 않더라”라고 했다.

 얼마 전 취업 포털 잡코리아가 직장인들을 대상으로 벌인 설문조사 두 개가 씁쓸한 현실을 잘 보여준다. 직장인 1152명 중 무려 65.0%가 ‘취미가 없다’고 답했다. 여유가 없고 먹고살기 바쁜 데다(57.9%) 피곤해서(20.8%) 그렇다. 직장인 707명을 대상으로 벌인 다른 설문에선 ‘살면서 가장 먼저 포기하게 되는 항목 톱5’에 ‘취미·여가’가 1위로 꼽히기도 했다. 이쯤 되면 취미 잔혹사다.

 양경수의 그림 에세이 ‘실어증입니다, 일하기 싫어증’에 묘사된 직장인들의 모습에 그 답이 있다. 직장인들 사이에서 ‘내 얘기 같다’며 화제가 된 이 책의 ‘퇴근’과 ‘주말’ 카테고리는 특히 눈물겹다. 퇴근 후 독서나 할까 했지만 책만 펴놓은 채 바닥에 널브러져 잠이 들어버린다. 주말엔 오랜만에 전시회도 가고 쇼핑도 하겠노라 잔뜩 계획을 세웠지만 현실은 피곤에 절어 방바닥만 뒹군다. 이 모습에 공감하는 이들에겐 어쩌면 덕후들의 세상은 여전히 멀고 먼 딴 세상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장선희 문화부 기자 sun10@donga.com
#취미#hobybo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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