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일 개봉한 프랑스 애니메이션 ‘발레리나’에는 ‘흙수저’ 소녀 펠리시가 주인공으로 나온다. 보육원에서 자란 소녀는 가진 게 정말이지 하나도 없다. 춤을 사랑해 파리의 발레리나가 되길 꿈꾸지만 역시나 현실은 녹록지가 않다.
텅 빈 연습실, 헤진 옷을 입고 비질을 하다가 우연히 춤을 추게 되고 누군가의 눈에 띄어 발탁되는….
영화 초반까진 이런 ‘뻔한’ 전개를 예상했다. 모름지기 주인공이란 돈과 ‘빽’은 없어도 비범한 능력 정도는 타고난 것으로 그려지게 마련이니. 하지만 펠리시는 능력도 없다. 쉬운 턴 동작 하나에 맥 못 춘 채 고꾸라지고, 기본적인 다리 찢기도 바드득 뼈 소리를 내고서야 겨우 해낸다. 그런 소녀에겐 “우울한 코끼리처럼 몸이 무겁다” “타고난 게 하나도 없다”는 혹평만 쏟아진다. 여태껏 봐 온 애니메이션 캐릭터 중 가장 ‘짠내’나면서도 현실적인 캐릭터다.
“다 관둘래요. 더는 못해요.”
한국에선 아직 개봉 전인 할리우드 영화 ‘배드 맘스(Bad Moms)’ 속 대사다. 영화엔 너무나 현실적인 워킹맘들이 주연으로 등장한다. 에이미(밀라 쿠니스)는 ‘계약직’ 워킹맘이다. 워킹맘을 다룬 비슷한 영화 ‘하이힐을 신고 달리는 여자’(2007년) 속 주인공 케이트처럼 고액 연봉을 받는 잘나가는 펀드매니저도 아니고, 남편도 한심한 인물로 그려진다. 혼자 버둥대며 직장인, 엄마 노릇 모두 완벽히 해보려는데 무엇 하나 변변치 않다. 결국 제풀에 지쳐 “그동안 최선을 다했는데 더는 못 해먹겠다”며 태업을 선언한다. ‘B급’ 개그로 점철된 이 영화가 미국에서 1억1132만 달러(약 1283억 원)를 벌어들이며 흥행에 성공한 데는 마치 나를 보는 듯, 딱히 잘나지 않아 ‘현실적인’ 워킹맘 캐릭터가 관객들의 공감을 산 게 한몫했을 것이다.
2000년대에 학교를 다닌 여성이라면 ‘알파걸’ 신드롬에 노이로제가 걸렸을 가능성이 크다. 미국 하버드대 아동심리학 교수 댄 킨들런의 책 ‘알파걸-새로운 여자의 탄생’(2007년)에서 ‘학업과 운동, 리더십 모든 면에서 남자에게 뒤지지 않는 엘리트 소녀’로 처음 정의된 이 단어는 이후 수많은 젊은 여성들의 삶을 옥죄었다. 너도 나도 알파걸 대열에 합류하는 분위기에 현실의 99% ‘비알파걸’은 알 수 없는 자책감을 느꼈다. 알파걸에게 쏟아진 스포트라이트에 은근한 박탈감을 느낀 이들도 적잖았을 것이다.
시간이 흘렀다. 나이가 든 알파걸 혹은 알파걸 지망생들은 이젠 또 집과 직장에서 완벽한 알파맘이 되길 스스로 채찍질하고 있다. 세상이 정해놓은 완벽한 이상향에 끝없이 스스로를 우겨넣는다. 실은 ‘발레리나’의 펠리시처럼 꿈은 있어도 환경이 안 따라주는 게 대부분 소녀들의 삶이고, ‘배드 맘스’의 에이미처럼 일이고 육아고 ‘완벽’과는 거리가 먼 게 대다수 워킹맘들의 현실일 텐데 말이다.
참고로 ‘발레리나’의 펠리시는 피나는 노력 끝에 발레리나로 화려하게 데뷔한다. 에이미도 결국 직장인과 엄마로서의 삶에서 모두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는다.
이 영화들에서 유일하게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다. 까짓것, ‘백조의 호수’ 무대에 못 서면 어떻고, 별다른 고군분투 없이 평범한 워킹맘으로 살면 또 어떤가. 영화니까 ‘해피엔딩’이 필요했겠지만 굳이 그런 극적인 성취가 없더라도 두 주인공의 인생은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지 않을까 싶다. 비록 그들의 인생이 세상 기준의 해피엔딩이 아닐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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