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켓몬 트레이너는 지난해 교육부가 조사한 ‘진로교육 현황조사’에서 초등학생의 선망직업인 교사(1위), 운동선수(2위), 프로게이머(10위)를 합쳐놓은 듯한 직업이다. 육성과 포획이라는 업무 특성도 그렇거니와 게임 속 최고의 선망직업이라는 점도 그렇다.
1996년 2월 첫 출시된 포켓몬 게임 시리즈에서 주인공인 한지우(원작명 레드)는 10살, 꿈은 포켓몬 트레이너라고 밝히고 모험을 떠난다. 저 나이 때부터 포트폴리오를 만드는 걸 보면 어지간히 좋은 직업이려니 싶다. 최근 서울 강남·서초지역 초등 4~6학년 학생들 중 일부가 벌써 학생부종합전형(학생부 포트폴리오 중심의 대입전형)을 위한 ‘스펙쌓기’를 시작하는 것과도 닮은꼴이다. 게임 속 포켓몬 트레이너는 고소득 전문직이라는 설정이 아닐까.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게임 속 이야기다. 현실에서도 포켓몬을 팔아 현금을 버는 사람들이 있지만 선망직업과는 거리가 한참 멀다. 오히려 이들은 해적이나 밀수업자에 더 가깝다.
최근 중고나라에는 매일 심심찮게 돈을 받고 포켓몬을 대신 잡아준다는 대리포획 글이 올라온다. 게임계정을 맡기고 돈을 주면 포켓몬도 대신 잡아주고, 레벨업도 대신 해준다는 설명이다. 흔히 ‘대리’라고 불리는 이들 프로 트레이너들은 다양한 제목으로 이목을 끈다. △매우 저렴하게 육성해 드립니다(보모형) △개체값 좋은 포켓몬 많습니다(마장동 우시장형) △알 부화 가능합니다(발명왕 에디슨형) 등 개성있는 트레이너도 쉽게 만날 수 있다.
이들 대리게임은 당연히 정상적인 게임 운영과는 거리가 멀다. 편법 및 불법 운영으로 눈총의 대상이다.
최근 경찰청은 게임을 대신 해주는 조건으로 돈을 받는 이들 대리게임이 사이버 범죄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며 주의해줄 것을 당부했다. 구글 이메일 계정과 비밀번호 등을 알려줘야 하는 만큼 정보유출 가능성이 있고, 사기 피해를 당할 수 있다.
게임의 재미를 반감시키는 점도 대리가 눈총을 받는 이유 중 하나다. 대리들은 포켓몬을 빨리 잡기위해 각종 꼼수를 마다하지 않는다. 주로 GPS망 교란이나 ‘오토’(자동사냥 프로그램)과 같은 일종의 해킹 프로그램을 통해서 포켓몬을 잡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희귀종 포켓몬마저 대리들이 이같은 편법으로 쉽게 채집하다 보니 게임의 묘미가 사라진다. 대리가 꼼수로 얻은 희귀종 포켓몬 ‘잠만보’와 ‘망나뇽’은 중고장터에서 현재 1000~3000원 정도로 거래된다. 누군가는 어렵게 발품을 팔아 간신히 얻는 이들 희귀종이 지하경제에선 ‘천하장사 소세지’나 ‘치킨마요’ 만큼의 고깃값으로 팔려나간다. 게임을 정직하게 이용한 사람만 허탈해진다.
심지어 자동사냥 프로그램은 게임의 정상적인 운영을 방해하는 것으로 간주돼 불법(게임법 46조)이다. 이는 게임 시스템 상에서도 강하게 규제하는 대상이어서 적발시 계정 영구정지 등의 조치를 당할 수 있다. 게임 상에서 사형선고를 받을 만큼 중죄인 셈이다.
이처럼 대리게임과 불법사용에 눈총을 주고 규제하는데도 여전히 성행하는 이유가 뭘까.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게임은 현실의 축소판이기 때문”이라는 해석을 내놨다.
“게임 캐릭터를 통한 상대적 비교와 경쟁심리, 과시욕구가 작용하는 겁니다. 좋은 아이템과 캐릭터이 이를 갖지 못한 다른 사람들을 무시할 수 있는 근거가 되는 거죠. 게임이라는 게 우리 현실을 그대로 옮겨놓은 겁니다.”
곽 교수는 현실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게임에선 받지 않으려는 심리가 작용된다는 설명도 덧붙인다.
대리게임이 우리 사회의 축소판이라는 말이 묘한 여운을 남긴다. 과정을 건너뛰고 결과를 얻을 수 있고, 그 결과조차 돈으로 살 수 있다고 믿는 우리는 가상사회조차 누군가가 타인의 욕망을 대리 수행하는 ‘대리사회’(김민섭 씨 책 제목)로 만든 셈이다. 왜 게임 속에선 불법과 편법이 판을 치느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이토록 간단하다. 현실과 판박이니까.
특히 대리게임으로 몸살을 앓는 ‘리그오브레전드’의 경우, 지난해 약 2만 건의 대리게임을 적발했는데 상당수가 청소년층이라고 한다. 퍼즐을 푸는 과정의 즐거움이 사라지고 등급비교만 앞세우는 게임문화가 섬찟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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