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청구서 파장]美장관 만난뒤 성과 자화자찬… 펜스 ‘리폼’ 발언을 ‘개선’으로 축소… 일각 “정권말기 관료 무책임 행태”
마이크 펜스 미국 부통령이 지난달 18일 서울을 찾아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손질(reform)하겠다”고 하자, 수출기업들의 불안감은 고조됐다. 하지만 산업통상자원부는 “개정이 아닌 ‘개선’의 의미”라며 의미를 애써 축소하고 파장을 경계했다.
‘진실의 순간’은 2주도 안 돼 찾아왔다. 열흘 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로이터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직접 ‘재협상(renegotiate)’과 ‘폐지(terminate)’ 방침을 밝힘으로써 낙관론으로 일관하던 한국 통상당국을 패닉에 빠뜨렸다. 트럼프 대통령은 한술 더 떠 “펜스 부통령이 한국 정부에 입장을 전했다”고 공개했다. 결국 펜스 부통령의 발언은 미국의 진의가 무엇인지를 파악할 수 있는 일종의 ‘스모킹 건(smoking gun·결정적 단서)’이었던 셈이다.
미국은 통상 압박을 이만큼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전부터 한미 FTA에 대해 여러 차례 경고음을 냈다. 미국무역대표부(USTR)는 3월 초 ‘한미 FTA로 미국의 대한(對韓) 무역적자가 2배로 늘었다’는 보고서를 내놨다. 미국 국가무역위원회 위원장은 주형환 산업부 장관이 윌버 로스 미 상무장관을 만나기 위해 미국에 있던 당시 “삼성과 LG전자가 무역 부정행위를 하고 있다”며 작심하고 비판하기도 했다.
하지만 산업부는 “한미 FTA의 객관적 성과를 미국과 공유했다”거나 “앞으로 한미 FTA의 충실한 이행과 첨단산업 분야의 협력을 강화하기로 했다”는 장밋빛 보도자료로 양국 통상장관의 만남을 미화하는 데 급급했다. 미국 측의 강성 발언이 나올 때마다 “구체적인 수정 요구가 없으니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는 식의 논평만 반복했다.
반면 중국과 일본 등은 통상 마찰을 피하기 위해 미국의 정책 기조를 파악하며 기민하게 움직였다. 중국은 ‘100일 계획’을 제시하며 환율조작국 지정과 관세 보복을 피했다. 일본은 미국에 4500억 달러 규모의 투자와 70만 개 일자리 창출을 약속해 미국의 환심을 샀다. 낙관론에 취해 있던 한국 정부는 결국 미국의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방위비 분담 요구와 FTA 재협상이라는 ‘이중압박’에 속절없이 끌려다닐 처지에 놓였다.
일각에서는 산업부의 잇단 오판이 정권 말기의 흐트러진 공직 기강과 무관치 않다고 지적한다. 관료들이 차기 정부에 일을 떠넘기려 상황의 심각성을 축소하기에 급급했다는 것이다. 수출 의존도가 높은 한국에 통상 문제는 정권을 넘어 국가의 생존과 직결된 일이다. 통상 관료들이 위기 대응의 ‘골든타임’을 놓치지 않도록 분발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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