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하청업체 대표 K 씨는 새로 직원을 뽑을 때마다 긴장한다. 기껏 뽑은 직원이 언제 그만둘지 모르기 때문이다. 큰 기업으로 옮겨가는 경우도 있지만 비전이 없다며 그냥 관두는 직원도 적지 않다. 청년 실업 뉴스가 나올 때마다 황당한 느낌이지만 요즘 대학생들을 ‘헝그리 정신’이 없다고 욕할 마음은 없다. 작년 고용노동부 조사에 따르면 중소기업 정규직 임금은 대기업 정규직 임금의 절반인 52.7%에 불과했다. 복지 혜택과 사회적 평판은 말할 것도 없다. 내 자식이라도 중소기업 취업은 말릴 거라는 게 K 씨의 속내다.
이웃 일본 대학생들은 정반대다. 중소기업에 취업해도 큰 불만이 없다. 대기업과 처우가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일본 후생노동성이 매년 발표하는 임금격차 조사 결과를 보면 일본 중기업(상근근로자 100∼999명)의 임금 수준은 최근 15년간 대기업(1000명 이상)의 83%, 소기업(10∼99명)은 75% 수준이다. 특히 대졸 초임은 한국 돈으로 연 2000만∼3000만 원 수준으로 거의 차이가 없다.
일본의 취업 호황은 저출산으로 경제활동인구는 줄었는데 전후 베이비붐 세대가 한꺼번에 은퇴하면서 생긴 일자리 공백이 1차 요인이다. 하지만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임금 격차를 최소화해 ‘양질의 일자리’를 많이 만들어내는 사회 풍토도 놓쳐서는 안 되는 대목이다.
기업인들 얘기를 들어보면 일본 대기업은 대체로 하청 중소기업들의 적정 이윤을 보장해준다. 이 때문에 한국 중소기업들도 일본 대기업과는 일단 한번 거래를 트면 사업하기가 오히려 편하다고 입을 모은다. 그 대신 중소기업은 대기업이 어려울 때 고통을 분담하며 의리를 지키는 상생 구조가 정착돼 있다.
한국은 정반대다. 일부 경영자의 탐욕도 한 원인이지만 해마다 파업으로 천문학적 임금 인상을 주도하는 대기업 강성 노조의 책임도 묵과할 수 없다. 중소기업으로 돌아갈 이윤을 이들이 독점하니 2차, 3차 하청업체는 채산성을 맞추기 위해 노동자를 외국인으로 교체할 수밖에 없다. 과거 중동으로 진출한 우리 산업역군이 그랬듯이 한국에 온 외국인 노동자는 담배꽁초까지 주워 피우며 임금을 본국 가족에게 송금한다. 돈을 쓰지 않으니 공장 근로자들이 월급날 소주 한잔하며 떠받치던 밑바닥 경제까지 무너지고 있다.
기업은 기업대로 국내에 더 이상 공장을 지을 이유가 없다. 현대자동차만 해도 인건비도 싼 해외 공장의 생산성이 울산 공장의 갑절 이상이다. 청년 일자리가 고스란히 해외로 유출되는 셈이다. 그나마 국내에 남은 일자리도 노동 유연성이 확보 안 되니 기계로 대체할 수밖에 없다.
문재인 정부가 공공부문 일자리 창출에 속도를 내고 있지만 근본 처방은 될 수 없다. 세금으로 일자리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 세계 어느 정부도 골머리를 앓을 일이 없다. 노동인구 4명 중 1명이 공무원인 그리스의 파산은 생생한 반면교사다. 논란의 소지가 큰 일자리 추경을 일단 ‘급한 불 끄기’로 규정한 장하성 청와대 정책실장의 현실 인식은 그래서 타당하다.
정부는 급한 불은 끄되 한국에 양질의 일자리가 부족한 근본 원인부터 제대로 짚어야 한다. 이 과정에서 다양한 계층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기업을 배제하거나 경영자단체의 입을 막아서도 곤란하다. 모든 정규직을 비정규직화해 노동시장 진입장벽이라도 낮춰 달라는 어느 취업 준비생의 하소연도 들어봐야 한다. 평면적인 관점으로 문제를 파악하고 이분법적 처방을 내린다면 한국 경제는 희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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