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왜 사는가를 묻는다면 고상한 철학적 대답보다 의식주(衣食住)를 해결하려고 산다 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겁니다. 옷에 관해서는 반평생을 의사 가운을 입고 살았으니 안목이랄 것이 없습니다. 음식은 정신분석학과 엮어 책을 한 권 써 냈으니 조금 나은 수준입니다. 집은 요즘 부쩍 관심이 생겼습니다. 책과 서류로 둘러싸인, 협소한 연구실 생활을 끝내서인지 앞으로 넓은 공간을 갖기를 소망합니다.
집짓기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에도 자주 나올 정도로 많은 사람들의 관심사입니다. 이 글에서는 제가 건축주라고 가정하고 집짓기의 실체를 분석해 보겠습니다. 집짓기는 집터 구입, 설계, 시공의 과정을 거칩니다. 비유하면 집짓기는 배우자를 골라 결혼하고, 출산 계획을 세우고, 아이를 낳아 키우는 일과 닮았습니다.
땅은 집을 지을 수 있는 곳인지, 깊게 파면 물은 안 나오는지, 지반이 튼튼한지를 잘 따져 보아야 합니다. 땅은 남자에게는 처가, 여자에게는 시집과 같습니다. 배우자의 본가가 그 사람의 근본인 것처럼 땅은 집을 세울 바탕입니다.
다음은 설계를 맡아 줄 건축가를 신중하게 선택해야 합니다. 내 인생 설계에 동참할 배우자를 잘 만나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결혼할 두 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계획을 세운다면, 건축주와 건축가도 앞으로 지을 집의 설계를 의논합니다. 그러다가 최종 설계 도면이 나오는 날은 신혼부부가 아기를 가졌다는 이야기를 들은 날과 흥분되는 정도가 비슷할 겁니다. 좋은 설계가 되려면 두 사람 사이의 뜻이 맞고 소통이 자유로워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한쪽이 일방적으로 정하는, 무리한 출산 계획처럼 삐걱거립니다. 오래전이지만 건축가의 의견이 거의 절대적이었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해외여행 자유화가 되기 전에는 평범한 사람들이 집에 대한 안목을 키우고 높일 기회가 거의 없었습니다.
요즘은 인터넷 검색이나 책으로도 다양한 건축 지식을 혼자서 쌓을 수 있습니다. 이제 건축가의 안목을 건축주가 절대로 따라갈 수 없었던 시대의 종말이 오면서 두 사람 사이의 관계는 일방에서 쌍방으로, 복잡하고 어려워졌습니다. “끝나면 그냥 들어와서 사세요”가 더 이상 통하지 않으니 건축가와 건축주 사이에 새로운 관계의 정립이 필요하지만 사람의 생각이나 관행이 쉽게 바뀌지 않아 갈등이 생기기도 합니다. 건강한 아이를 낳으려면 부부 간에 생각이 맞고 직장 형편 등도 고려하는 합리적인 계획을 세워야 하는 것처럼 좋은 집을 지으려면 건축가와 건축주 간에 생각을 털어놓고 공유하는 협업이 필요합니다. 물론 건축가는 상대적으로 건축주에 비해, 비교해서는 안 될 정도로 전문가이지만 협업 과정에서 두 사람 모두 해당 건물에 대해서는 점차 무르익어 가는 아이디어들을 가지게 됨도 사실입니다. 단, 열린 마음을 가졌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평범한 건축주는 건축가와 함께 설계 과정을 거치면서 초등학생 수준의 지식을 습득하게 됩니다. 아직도 설계 도면은 외국어 교본처럼 애를 써야 겨우 어느 정도 읽힐 겁니다. 설계의 철학과 세세한 내역이 도면으로 구현되었다고 하더라도 전문가인 건축가와 비전문가인 건축주 사이에 도면이 소통의 효율적인 수단이 되기는 힘듭니다. 말로 하는, 도면의 통역이 필요하지만 건축주에게는 일생일대의 유일한 프로젝트가 특히 능력과 명망이 있는 건축가에게는 그저 프로젝트 중 하나일 뿐이니 말과 달리 결정적인 어려움으로 부딪혀 옵니다. 궁금해서 자세한 말을 듣고 싶어도 도면에 다 있다는 답변이 돌아오면 건축주는 좌절과 우울의 늪에 빠집니다.
건강한 아이를 임신해 출산하고 튼튼하게 키워 제 몫을 하도록 하려면 출산 계획만 훌륭해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제대로 먹이고 예방접종도 제때 하고 안전하고 좋은 시설에서 교육을 시켜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집짓기도 시공 회사를 잘 선택해야 합니다. “집짓다가 죽는다, 아니다, 요새는 많이 좋아져서 10년쯤 늙을 각오만 하면 된다”는 말이 아직 있을 정도로 시공 회사 선정은 건축주에게도 그리고 건축가에게도 매우 중요합니다. 결국 설계 도면을 구체적으로 실행하는 주체는 현장의 분들에게 달렸습니다. 아무리 건강한 아이를 낳았어도 학교 보냈다가 안 보는 사이에 사고가 나서 다치면 큰일이라는 말입니다.
시공 회사가 선정되면 집짓기에 일종의 삼각관계가 생깁니다. 그 안에서 설계자이자 감리자인 건축가, 건축주, 그리고 시공 회사가 서로 움직입니다. 때로는 각자의 입장이 달라 갈등이 생깁니다. 시공에서 작업 내용이나 예산 운영에 문제가 없다면 갈등은 주로 최종 도면의 내역을 집행하려는 건축가와 쓸 수 있는 예산의 한도를 지켜야 하는 건축주 사이에 일어납니다.
갈등 해소의 전제 조건은 소통에 걸림돌이 없어야 한다는 겁니다. 서운한 감정을 앞세우기보다는 ‘좋은 집을 짓는 작업 자체’에 초점을 두어야 합니다. 건축주도 건축가의 심정을 이해하려 노력해야 하지만 건축가도 결국 그 집이 건축주의 공간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자식을 잘 키워보겠다는 부모의 욕심이 오히려 자식에게 큰 부담을 주는 일이 바람직하지 않은 것처럼 어느 선에서 타협을 해야 합니다. 무식하게(?) 이야기하면 튼튼하고 관리가 쉬운 집이, 보기에 좋지만 살아 보면 불편한 공간보다 건축주에게는 더 유용합니다. 부모가 자식의 삶을 대신 살아줄 수 없는 것처럼 건축가도 건축주의 삶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시공이 진행되고 도면이 아닌 눈앞에 실제로 공간이 보이면 건축주는 건축 문맹에서 유아기, 소아기를 거친 청소년기로 옮겨 갑니다. 청소년기는 청소년이 스스로 정체성을 확립하는 시기입니다. 이때 청소년의 행동은 기성세대(‘전문가인 건축가’)가 보기에는 매우 변덕스럽지만 청소년은 이 시기를 잘 거쳐야 젊은 성인(‘계몽된 건축주’)으로 거듭납니다.
청소년 수준의 건축주에게 건축가의 전문적 제안은 구속과 제약으로 들릴 수도 있습니다. 깊게 생각하면 불가피함을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건축가는 전문성을 앞세워 이미 갔던 익숙한 길을 주장하고, 건축주는 아직 안 가본 길에 대해 전혀 개념이 없거나 자신만의 새로운 길을 가고 싶어 합니다. 갈등의 해소는 진료실 안에서도, 이렇게 밖에서도 여전히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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