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트렌드/하정민]괴짜 경제학자의 글쓰기 강의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6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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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로머 세계은행 수석 이코노미스트 겸 선임 부총재
폴 로머 세계은행 수석 이코노미스트 겸 선임 부총재
하정민 디지털통합뉴스센터 차장
하정민 디지털통합뉴스센터 차장
“짧게 써라. 그래야 사람들이 읽을 것이다. 명료하게 써라. 그래야 사람들이 이해할 것이다. 그림 그리듯 써라. 그래야 사람들이 기억할 것이다. 무엇보다 정확하게 써라. 그래야 사람들이 그 빛에 이끌릴 것이다.”

‘퓰리처상’을 만든 전설적인 미국 언론재벌 조지프 퓰리처의 명언이다. 퓰리처와 여러 글쓰기 대가가 좋은 글의 첫째 요건으로 언급했듯 단문의 장점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소설가 김훈의 명성도 형용사와 부사 등 일체의 수식어를 배제한 선 굵고 힘 있는 단문에서 기인했다.

어려운 경제용어와 복잡한 수학공식만 넘쳐날 것 같은 세계은행(WB)이 때 아닌 단문 논쟁에 휩싸였다. 지난해 10월 수석 이코노미스트 겸 선임 부총재로 취임한 폴 로머 전 뉴욕대 교수(62)가 직원들의 글쓰기 방식에 메스를 들이댄 탓이다. 그는 ‘경제 성장의 원천은 창의적 아이디어와 신기술’이라는 내생적 성장이론(endogenous growth theory)의 대가로 매년 노벨 경제학상 후보로 거론된다. 하지만 주류 경제학계를 향해 독설과 비판을 일삼아 ‘괴짜’ ‘이단아’로도 불린다.

영국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의 최근 보도에 따르면 로머 부총재는 세계은행이 내놓는 수천 건의 보고서가 사실상 버려지는 이유를 길고 지루한 문체 때문이라고 봤다. 그는 간략하고 읽기 좋은 보고서를 위해 ‘그리고(and)’라는 단어의 사용을 줄이라고 지시했다. 보고서 전체에서 ‘and’의 비중이 2.6%를 넘는 글의 최종 공표를 불허하겠다고도 했다. 2.6%는 학술 논문에서 ‘and’가 등장하는 평균이다.

프랑코 모레티 미 스탠퍼드대 비교문학과 교수팀이 1940년대부터 현재까지 세계은행 보고서를 분석한 결과 1940년대 보고서 내 ‘and’의 비중은 2.6%였지만 2012년 6%로 2배 이상으로 늘었다. 유엔(UN)이나 에이즈(AIDS)처럼 단어의 머리글자를 모은 두문자어(頭文字語·acronym)도 1970년대 3%에서 5%로 증가했다. 적정가치(fair value)나 포트폴리오(portfolio) 같은 난해한 금융용어 사용도 일반화했다.

‘and’를 적게 쓴 글이 무조건 훌륭한 글은 아니다. 하지만 접속사와 복잡한 신조어의 남발이 독자의 읽기 욕구를 떨어뜨리는 것은 분명하다. 2014년 세계은행이 발표한 문서 1611건 중 32%는 아무도 다운로드를 하지 않았다.

로머 부총재는 세계은행으로 옮기기 직전인 지난해 9월에도 ‘거시경제학의 문제’라는 글에서 주류 경제학자들을 질타했다. “세계 경제학계가 지난 30년간 퇴보만 거듭했다”는 예의 도발적 문장으로 시작한 이 글에서 그는 현재의 주류 경제학은 수학에만 매몰된 유사(類似) 과학이며 그 이유는 어려운 경기변동 모델의 남용, 학자들의 패거리 문화와 빈약한 글쓰기 실력이라고 비판했다.

그가 세계은행 직원을 다루는 방식이나 동료를 비판하는 태도에 대해선 갑론을박이 있겠으나 ‘명료한 글쓰기만이 명료한 사고를 낳는다’는 주장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맞춤법 같은 사소한 오류를 지적하는 일조차 ‘진지충’이라는 비난을 듣는 시대. 로머 부총재 같은 모난 돌이 더 많았으면 좋겠다. 그의 건투를 빈다.
 
하정민 디지털통합뉴스센터 차장 dew@donga.com
#조지프 퓰리처#단문의 장점#내생적 성장이론#퓰리처의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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