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지방선거 이후로 세율 인상을 미룬 정부가 이달 내놓을 세법 개정안에 과세표준 구간 조정을 포함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노무현(종합부동산세 신설), 이명박(소득세 및 법인세율 인하), 박근혜 정부(세액공제 개편)에서 각각 세법을 크게 고치려다가 거센 반발이 나타난 것을 감안해 세율을 건드리지 않는 소폭의 증세(增稅)를 추진하는 것으로 보인다.
정부는 납세자들의 조세 저항을 최소화하면서 타깃을 고소득자로 한정시켜 갈등을 최소화하겠다는 속내를 드러내고 있다. 하지만 명목세율 확대 및 소득세 면세자 축소 등 정공법은 피한 채 본격적인 세수 확보 논의는 뒤로 미룬다는 비판은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 세 부담이 초(超)고소득자보다 소득 수준이 한 단계 낮은 연소득 5억 원 안팎 근로·사업자에게 몰릴 여지가 크다는 점도 논란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국정기획자문위원회가 소득세 최고세율(40%) 과표 구간을 5억 원 초과 소득에서 3억 원 초과 소득자로 낮추는 것은 ‘부자 증세’를 실현하겠다는 의지로 풀이된다. 국세청에 따르면 2015년 기준 과세표준 3억 원 이상 근로소득자는 1만9600여 명, 종합소득자(사업자 등)는 4만4800여 명이다.
이번 검토안에서 눈길을 끄는 부분은 문재인 대통령의 대선 공약보다 일부 후퇴했다는 점이다. 문 대통령은 대선 당시 소득세 최고세율을 42%로 높이고 최고세율의 적용 구간은 3억 원 이하로 낮추겠다고 공약했다. 이 가운데 과표 구간 조정은 검토가 이뤄지고 있지만 최고세율은 당분간 손대지 않을 방침인 것으로 전해졌다.
정부의 이런 방식은 세율 인상에 따른 국민적 조세 저항을 최소화하겠다는 계획과 닿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과거 정부에서 세율 숫자를 건드렸다가 납세자들의 반발이 나타난 적이 적지 않아서다. 내년 지방선거 전에 ‘세금폭탄’ 프레임에 걸려들어 정치적 부담을 짊어지는 것을 최소화하겠다는 게 정부 전략이다.
실제로 최근 정부가 검토하는 증세 방식은 이처럼 세율을 건드리지 않는 경우가 상당수다. 가업상속공제 수혜 대상 축소 방안이 대표적이다. 현재는 매출액 3000억 원 미만인 중견기업이 상속·증여세에서 최대 500억 원까지 공제받을 수 있는데, 정부는 공제 대상을 ‘매출액 2000억 원 미만 기업’으로 축소하고 공제 한도도 최대 300억 원으로 낮추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정부의 이런 증세 방침을 두고 정공법과 거리가 멀다는 지적도 나온다. 조세 저항이 상대적으로 약한 고소득층에만 세 부담을 지우는 방식으로 세제 개편의 초점을 맞추다 보면 자칫 ‘국민 개세주의’(모든 국민이 고루 세 부담을 나눠 짊어져야 한다는 것) 원칙과 어긋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정부는 부동산 보유세 인상, 소득세 면세자 비중 축소, 경유세 인상 등 세수 증대에 큰 영향을 줄 수 있는 세제 개편은 내년 지방선거 이후로 미루겠다는 방침을 숨기지 않고 있다.
전문가들은 정권이 유례없이 높은 국민적 지지를 받는 이 시점이 오히려 제대로 된 증세 논의를 할 때라고 입을 모은다. 박기백 서울시립대 세무전문대학원 교수는 “공약 이행 재원을 마련하려면 소득세 과표 구간 조정 정도로는 효과가 떨어진다”며 “집권 초기 지지율이 높은 상황에서 법인세, 에너지세 등 다른 세목들을 다루지 않는다면 내년 이후로는 세제 개편 추진이 더욱 어려워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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