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직위기 원전 건설 근로자들 “1%의 희망도 사라져”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7월 17일 03시 00분


[원전 건설 중단 후폭풍]망연자실 울주군 가보니

“나라를 지탱할 에너지를 만든다는 자부심에 청춘을 바쳤는데…. 이제는 대리운전 일을 알아보고 있습니다.”

15일 울산 울주군 서생면 한국수력원자력의 신고리 원전 5, 6호기 공사현장 입구. 협력업체 근로자 김모 씨(55)가 담배 연기 한 모금을 내뱉으며 이같이 말했다. 김 씨는 지난달 말 원전 공사가 중단된 이후 대기만 하고 있어 낮 12시, 이른 퇴근을 하던 길이었다. 김 씨는 그동안 원전 발전기에 전기가 잘 공급되도록 하루 10시간씩 배선 작업을 했다. 밀폐된 공간에서 숨 막히는 더위, 퀴퀴한 먼지와 싸우며 일했다. 김 씨는 “고단해도 국가 산업에 기여한다는 자긍심이 있어 버틸 만했는데 지금은 밥벌이하려고 뭐든 닥치는 대로 해야 할 처지에 놓였다”며 허탈해했다.

○ 실직 위기 근로자들 “이젠 진짜 끝”

김 씨처럼 신고리 원전 5, 6호기 공사 관련 협력업체 근로자들은 한수원 이사회의 원전 공사 중단 결정으로 일자리를 잃을 위기에 처했다. 문재인 대통령의 ‘일시 중단’ 발표에 따라 지난달 30일 공사가 멈춘 뒤 협력업체 근로자들은 공사 재개에 대한 일말의 희망을 안고 사태를 주시해 왔다. 하지만 14일 오전 한수원 이사회가 기습적인 중단 결정을 내리자 “이제는 진짜 끝났다”는 좌절감이 팽배해졌다. 이사회 중단 결정 후 사흘이 지나도록 한수원이 임금 보전 등 대책조차 내놓지 않아 이들은 좌절감에 더해 불안감에 시달리고 있다.

김 씨는 당장 4월 초 계약한 원룸 보증금 400만 원을 돌려받지 못할까 걱정이다. 다른 공장에 다니다 김 씨의 권유로 원전 건설 현장으로 옮겨온 친구도 볼 낯이 없다. 김 씨는 “일 시작한 지 한 달도 안 돼 공사가 중단되는 바람에 친구 가정까지 망쳐버린 것 같다”며 고개를 숙였다.

한수원 노조는 16일 오후 1시 공사 현장에서 노조원 100여 명이 비상대책회의를 여는 등 조직적 반발이나마 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협력업체 근로자는 결집된 목소리조차 내지 못하는 형편이다. 중단 결정으로 가장 큰 피해를 보는 ‘약자 중의 약자’인 셈이다.

○ “이주시켜 준다더니… 보상은 어떡하나”

울산 울주군 신고리 원전 5, 6호기 공사 현장 인근의 신리마을 주민이 15일 갈라진 집 벽을 가리키며 “이주시켜 준다기에 수리도 안했는데 이젠 오도 가도 못하게 됐다”고 했다. 울주=구특교 기자 kootg@donga.com
울산 울주군 신고리 원전 5, 6호기 공사 현장 인근의 신리마을 주민이 15일 갈라진 집 벽을 가리키며 “이주시켜 준다기에 수리도 안했는데 이젠 오도 가도 못하게 됐다”고 했다. 울주=구특교 기자 kootg@donga.com
신고리 5, 6호기 건설 현장에서 50m 거리에 있는 신리마을 150여 가구 주민들은 이날 삼삼오오 평상에 모여 한수원을 성토했다. 특히 갑작스러운 공사 중단에 따라 보상금을 받을 길이 막막해졌다는 탄식이 많았다. 새로운 터전으로 옮기지도 못하고, 폐허가 돼버린 마을에 머물 수도 없는 난감한 처지가 됐다.

이날 기자가 찾은 박모 씨(80·여) 집은 방 천장이 비에 흠뻑 젖어 언제 무너져 내릴지 모를 정도였다. 창고도 최근 폭우로 주저앉았다. 박 씨는 “한수원이 이주시켜 준다고 해서 집수리를 미뤄 왔는데 한순간에 배신하면 어떡하느냐”며 “10대 때 이 마을에 시집와서 한평생 원전 옆에서 고통만 받다 죽게 생겼다”고 울먹였다.

원전 주변 식당도 손님이 급격히 줄고 있다. 토요일인 15일 오후 7시경 남모 씨(54·여)의 추어탕집에는 손님이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평소 같으면 가족 단위 주말 손님이 많을 시간이지만 공사 중단으로 근로자도 하나둘 떠나고 한수원과 협력업체 직원들도 흉흉한 분위기를 의식해 외식을 꺼리고 있어서다. 남 씨는 매출이 지난해 여름과 비교해 3분의 1로 떨어지자 3명이던 종업원을 1명으로 줄였다. 그는 “혹시나 했는데 이사회 중단 결정으로 1%의 희망도 사라졌다”며 “공사장 주변 식당 10여 개가 모두 망할 수밖에 없다”고 하소연했다.

울주=구특교 기자 koot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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