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개봉 영화 중 두 편을 보고 깊은 감동을 받았다. ‘인셉션’ ‘인터스텔라’를 만든 크리스토퍼 놀런의 최신작 ‘덩케르크’와 ‘그을린 사랑’ ‘블레이드 러너 2049’를 연출한 드니 빌뇌브의 ‘컨택트’다. 각각 전쟁 영화와 공상과학(SF) 영화의 외피를 둘렀지만 ‘시간의 비선형(非線形·non-linear)’을 소재로 했다는 공통점도 있다.
많은 소설과 영화가 시간여행이나 미래예측 능력을 소재로 삼았지만 두 영화는 이 뻔한 설정을 거부하고 몇 발 더 나아간다. 덩케르크는 ‘해변에서의 1주일, 바다에서의 1일, 하늘에서의 1시간’이란 3개 시간대에서 벌어진 사건을 마치 같은 시간에 벌어진 것처럼 보여준다. 누구나 덩케르크 해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고 2차 세계대전의 결과가 어떤지를 안다. 하지만 서로 다른 시간에 벌어지는 각기 다른 사건과 인물들을 씨줄과 날줄 엮듯 매끈하게 직조(織造)한 감독 덕에 손에 땀을 쥐고 영화에 몰입할 수 있었다.
‘컨택트’는 불치병으로 딸을 잃는 여주인공 뱅크스 박사를 보여주며 영화를 시작한다. 언어학자인 그는 물리학자의 도움을 받아 외계인과의 소통을 시도한다. 그 과정에서 아픔을 극복하고 그 물리학자와 사랑에 빠진다. 관객들은 영화 후반에야 도입부에 목격한 딸의 죽음이 뱅크스 박사의 미래에 벌어질 일임을 알게 된다. 즉 과거를 회상하는 플래시백(flash back)이 아니라 미래의 사건을 먼저 보여주는 플래시포워드(flash forward) 기법이다.
기술 발전은 ‘시간의 비선형’을 특정 영화의 서사가 아니라 우리 삶의 일부로 만들었다. 인터넷과 넷플릭스가 없던 시절, 시청자는 방송국이 정한 시간에 드라마 1편을 TV로만 본방 사수하는 수동적 존재였다. 지금은 누구나 N개의 스크린을 통해 수십 개의 드라마를 몰아 보고 건너뛰며 본다. 가게 문을 여는 특정 시간에만 쇼핑을 할 수 있던 경험은 아마존의 등장으로 사라졌다. 뉴스 소비, 관계 맺기 등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선형적 세상에서 시간은 유한하다. 시작과 끝이 있고 인과관계도 명확하다. 하지만 과거, 현재, 미래가 공존하는 비선형 세상에선 시간이 한쪽 방향으로만 흐르지 않는다. 특정 사건은 순차적으로 발생하지 않고 동시적으로 반복된다. 또 모든 것이 예측 불가능하다.
이런 세상일수록 주체적 삶을 영위하려는 태도가 중요하다. 인간의 의지와 관계없이 너무나 급격하고 거대한 변화가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벌어지고 있어서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에게 집중하고 이를 만끽하려는 자세, 인생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이를 견디겠다는 강한 긍정이 있어야만 ‘시간’이 아닌 ‘순간’이 모여 ‘영원’을 형성하는 시대를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사랑하는 남자가 자신을 떠날 것이고, 그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가 죽는다는 걸 알면서도 그 남자를 선택하는 뱅크스 박사의 말이 귓가를 맴돈다. “결과를 알고 있지만 난 모든 걸 껴안을 거야. 그리고 그 모든 순간을 반길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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